“戰後 세계질서 흔들어… 美, 러와 손잡고 IS격퇴 나서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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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와의 세계대전]‘외교의 현인’ 키신저가 본 파리테러

16일(현지 시간) 오후 2시 반,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대회의실.

이날 열린 ‘글로벌 안보’ 포럼의 마지막 특별 좌담회 주인공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등장하자 회의실 안팎의 500여 명이 일제히 기립 박수로 맞았다. 리처드 닉슨 정부 시절 핑퐁외교로 미중 수교의 물꼬를 튼 ‘국제정치의 현인(賢人)’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92·사진)이었다.

당초 그는 이란 핵 협상에 대해 언급할 계획이었으나 화제는 온통 ‘이슬람국가(IS)’가 주도한 프랑스 파리 테러로 모아졌다. 키신저 전 장관은 지팡이에 보청기까지 끼고 나타났지만 고령을 무색하게 하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1시간 동안 파리 테러의 국제정치적 의미를 진단하고 미국 등 서방 세계의 대처 전략을 조언했다.

공교롭게도 IS가 다음 테러 목표로 워싱턴을 언급한 직후라 회의실 주변에는 차가운 불안감이 감돌았던 것도 사실. 좌담회 전에는 경찰이 테러 가능성을 의심해 CSIS 인근 워싱턴 시내 차도를 잠시 통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특강을 들은 참석자들은 “마치 영화 스타워즈의 절세 고수인 ‘요다 스승’의 고견을 들은 것 같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키신저 전 장관이 존 햄리 CSIS 소장과 나눈 좌담회와 그 후 동아일보 등 일부 내외신 기자들과 만나 나눈 대화를 엮어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파리 테러를 접하고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금껏 살면서 이것저것 다 본 나도 매우 놀랐습니다. 폭력의 잔혹성, 특히 희생자들의 처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번 테러는 뉴욕의 9·11 테러(2001년), 스페인 마드리드 테러(2004년), 영국 런던 테러(2005년 7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는 그야말로 ‘근본적인 도전(fundamental challenge)’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그는 “파리 테러를 접한 뒤 ‘나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며 “수십 년간 외교 현장에 있던 나 스스로에게도 ‘어디로 가야 하는가(Where do we go from here)’라고 자문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왜 파리가 두 번이나 공격당했을까요.

“파리는 그냥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닙니다. 현대의 공화국 제도를 만든 ‘정치 혁명의 어머니’ 같은 곳이고 서방 세계 정신의 한 축입니다. IS는 이걸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파리’를 공격함으로써 우리에게 충격파를 던지려 한 것이죠. 어쨌든 우리는 기존의 국제 질서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분기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도전’에 맞닥뜨렸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가요.

“IS가 기존 그 어떤 테러 조직보다 더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폭력의 잔혹성뿐만 아니라 국제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1, 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국경, 그러니까 지금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물리적 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거죠. 그들은 시리아, 이라크에 점령지를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 국가를 선포하면서 지금까지 누구든 지켜야 했던 최소한의 국제정치 질서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 IS가 위험한 본질적 이유입니다.”

―그런 IS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적의 적은 나에게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우선 러시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러시아는 30여 년 전 중동 지역의 통제권을 사실상 미국에 내준 뒤 조용히 있었지만 IS가 등장한 뒤 시리아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IS가 이 지역에서 세를 확장하면 시리아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러시아 국경도 침범할 수 있고, 이는 러시아 정세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고민을 활용해 미국이 과감하게 손을 잡는다면 중동 지역에서 IS에 대한 효과적 대처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러시아가 IS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시리아 반군을 공격해 (오바마 정부가 몰아내려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돕는 것으로만 이해하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IS를 몰아내는 게 더 급선무입니다.” 한편 이날 포럼에 참석했던 존 브레넌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IS의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러시아 정보기관과의 대화 채널 확대 등 정보 협력을 강화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올랑드 대통령이 IS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유럽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유럽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서방세계에 진정하고도 역동적인 멤버로 참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기존처럼 사안에 따라 서로 입장이 달라 결과적으로 방관할 게 아니라) IS가 세계에 던진 근본적인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파리 테러 이후 미 대선 주자들이 IS 대처와 관련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내 이슬람 사원을 폐쇄하겠다’고도 했습니다. 대선 주자들에게 조언하신다면….

“정치권이든 정부든 IS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현재와는 다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저 편하게 기존 정책을 반복하거나 정치적 슬로건을 즉흥적으로 낸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IS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당장에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을 길게 보고 대처해야 해법이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헨리 키신저 ::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로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를 마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71년 리처드 닉슨 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으로 발탁돼 미중 수교 등 현대 외교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1973년에는 베트남전 평화 협상을 주도한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77년 국무장관 퇴임 후에도 미 대통령들에게 외교 전략을 조언해 왔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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