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선천적 시각장애 딛고… 세상을 비추는 선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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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못보는 피아노 소녀 예은이와 멘토 이진욱

“요즘은 무슨 음악 들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가끔 찾아서 들어요.” “그 음악 들으면 기분이 어때?” “조용한 건물에서 차 마시는 기분?” 유예은 양(왼쪽)과 피아니스트 이진욱 씨의 대화는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 씨는 다큐 영화 ‘기적의 피아노’ 촬영 당시 유 양을 만나 인연을 맺은 뒤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요즘은 무슨 음악 들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가끔 찾아서 들어요.” “그 음악 들으면 기분이 어때?” “조용한 건물에서 차 마시는 기분?” 유예은 양(왼쪽)과 피아니스트 이진욱 씨의 대화는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 씨는 다큐 영화 ‘기적의 피아노’ 촬영 당시 유 양을 만나 인연을 맺은 뒤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소녀의 손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탄산음료 캔을 쥐고 있을 때는 작게 오므린 채, 책상 위에 올려놨을 때는 조금 느슨하게 편 채, 다섯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옆에 앉아 조금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상상 연주’를 하는 소녀. 지난달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피아노’의 주인공, 유예은 양(13)이다.

유 양은 다섯 살이던 2007년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해 처음 이름을 알렸다. 유 양은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이 태어나 수술로도 앞을 볼 수 없다. 악보는 물론이고 음표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본 적이 없는 소녀가 제목도 외우기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통째로 외워서 치는 모습에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열광했다.

하지만 잠깐의 인기는 소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영화는 ‘스타킹’이 안겨준 유명함이 사그라진 뒤인 2010년부터 약 3년 동안 유 양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후반 작업을 거쳐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또다시 2년, 소녀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달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유 양과, 영화에서 유 양의 멘토로 등장하는 피아니스트 이진욱 씨(35)를 만난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 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졸업하고 현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SBS ‘스타킹’에 출연해 기적의 소녀 피아니스트로 화제를 모았던 당시의 유예은 양(위쪽 사진). 하지만 이후 피아노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을 정도로 좌절도 많았다. 영화 ‘기적의 피아노’는 유 양이 ‘스타킹’에서 화제가 된 뒤로 어떤 좌절과 노력을 거쳐 성장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담았다. 보고싶은영화사 제공·동아일보DB
SBS ‘스타킹’에 출연해 기적의 소녀 피아니스트로 화제를 모았던 당시의 유예은 양(위쪽 사진). 하지만 이후 피아노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을 정도로 좌절도 많았다. 영화 ‘기적의 피아노’는 유 양이 ‘스타킹’에서 화제가 된 뒤로 어떤 좌절과 노력을 거쳐 성장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담았다. 보고싶은영화사 제공·동아일보DB
신동으로 불리던 소녀

“음…. 기억이 잘 안 나요.”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유 양이 가장 자주 한 말이다. ‘스타킹’에 출연했던 것도, 큰 행사에서 연주를 여러 차례 했던 것도,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TV 나갔을 때 믹키유천(박유천) 오빠랑 얘기했던 건 생각나요.” 2008년 SBS ‘초콜릿’에 출연해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를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잘 챙겨주던 멤버의 이름을 겨우 기억하는 정도다.

그러나 이 씨는 유 양을 만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1년 유 양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였다.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님 연구실에 들렀는데 예은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저와 잘 맞을 것 같다고요.”

유 양이 한예종까지 찾아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유 양의 어머니 박정숙 씨(45)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아버지 유장주 씨(48)는 경기 포천시 외곽에서 장애인 복지시설을 운영하며 장애인 10여 명과 함께 생활한다. 논밭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는 마땅한 피아노 선생님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 유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 양의 멘토를 찾아 여러 대학 음대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중 주성혜 한국예술종합대학 음악원 교수가 답장을 했고, 주 교수가 자신의 제자이던 이 씨를 유 양과 연결해줬다.

“예은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고 있던 친구예요. 사교육 없이 혼자 도서관에서 책 읽으며 학문을 터득하는 학생 같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테크닉 위주로 정확하게 치길 요구하는 일반적인 한국식 교육과는 안 맞는다고 선생님이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제가 하라는 거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거든요.”



악보를 보지 못하는 피아니스트

유 양이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세 살 무렵이다. 이웃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피아노를 집에 가져다 놨더니 건반을 누르며 놀다 스스로 음을 터득했고, 곧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유 씨가 이런 모습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 방송 출연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신동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 양의 꿈은 피아니스트.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콩쿠르에 나가 수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유 양이 한 곡을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른 학생보다 훨씬 길다. 선생님이 왼손과 오른손을 구분해 쳐 주는 선율을 녹음해 수십 번 반복해 들으면서 외워야 한다. 건반도, 악보도 볼 수 없으니 정확하게 쳐야 좋은 점수를 받는 콩쿠르에서는 절대 불리하다.

유 양에게 “연주회와 콩쿠르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묻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연주회요! 콩쿠르는 경쟁해야 하잖아요. 잘 쳐야 하니까…. 처음에는 학교에서 숙제가 너무 많이 나와서, 콩쿠르 나가면 숙제 안 해도 되니까 콩쿠르 나가는 것도 좋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영화에는 유 양이 콩쿠르에 도전했다 좌절하는 과정이 등장한다. 선생님에게 “왜 자꾸 박자를 버리느냐(정확히 치지 않느냐)”고 혼이 난 뒤 혼자서 피아노 앞에서 울기도 한다. 콩쿠르 출전 뒤 한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기도 했지만 지금은 훌쩍 큰 키만큼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처음에는 음을 하나도 안 틀리고 치는 게 잘 치는 건 줄 알았고, 그 다음엔 제 소리를 들으면서 치는 게 잘 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냥 즐기면서 치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아직도 유 양은 정확한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어제는 손목을 반듯하게 하고 손가락은 살짝 구부리고 피아노를 쳤어요. 그랬더니 손도 안 아프고 소리도 잘 나서 연습이 지루하지 않더라고요.”

피아노는 내 모국어

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유 양에게는 또 다른 재능이 있다. 바로 작곡이다. 영화에는 유 양과 이 씨가 함께 즉흥 연주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유 양이 그날 기분을 담아 선율을 만들어내면 이 씨가 조금 바꿔서 치고, 유 양이 다시 이어서 치는 식이다. 두 사람은 즉흥 연주를 주고받으며 유 양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인 백설공주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작곡했다. 2011년 8월 열린 이 씨의 연주회에서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일반 피아노학원에서 배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저만 해도 어릴 때 악보 보면서 8분 음표가 무엇인지부터 배웠는데, 예은이는 음의 높낮이나 리듬을 동물적으로 익혀서 치는 것 같더라고요. 어린아이들이 외국어를 알파벳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계속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예은이는 모국어 배우듯 피아노를 익힌 거예요.”(이 씨)

이 씨는 “그동안 혹독하게 연습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예은이처럼 좋은 소리를 내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아이가 소나타 한 악장을 다 쳐야만 김밥 하나를 주는 부모도 있다니까요. 그러다 보면 피아노를 왜 치는 지도 모르고, 재미도 못 느끼죠. 그런데 예은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정말 예뻐요.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제가 다 신기할 정도로요. 예은이가 곡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아, 이 아이가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지죠.”

유 양도 요즘 작곡 욕심을 좀 더 내고 있다. “곡을 만들긴 하는데 자꾸 잊어버려요. 그래서 구성해서 만들려고요. 글로 쓸 때 구성하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시작도 있고 클라이맥스도 있고 끝도 있고, 소설 쓰는 것처럼, 그러면 안 잊어버릴 거 같아요.”(유 양)

물론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다. 영화 촬영 중 제작진은 한 작곡 콩쿠르에 유 양이 출전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작곡한 곡을 악보로 제출해야 한다’는 조건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악보를 볼 수 없는 유 양이 악보로 자작곡을 제출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 음원으로 제출할 수 없느냐는 문의에도 주최 측은 악보로 제출해야 한다는 회신만 줄 뿐이었다. 한예종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소외계층 대상 아카데미에도 참가해보려 했지만 작곡 분야는 모집하지 않아 지원할 수 없었다.

‘피아노 플래시’ 들고 나타날 그날까지

하지만 포기란 없다. 유 양은 요즘 점자 악보를 익히고 있다. 음계는 다 배웠는데 악보 기호를 배우는 일이 남았다. 영어 점자 읽는 법도 배워서 이제 알파벳을 읽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배우고 외워야 할 것이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되는데 새로운 악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요즘 플루트를 배우는데, 처음엔 소리가 안 나서…. 선생님이 입 모양을 이렇게 해서 하라고 가르쳐 주셔서 이번 주에 겨우 소리가 났거든요. 플루트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에 어울리는 거 같아요.”

얼마 전 엄마가 마트에서 사와서 요리해준, “피아노를 진하게 치는 맛”이 나는 로브스터를 잊지 못하고, 배우 김상경이 나오는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를 너무 좋아해서 대사를 다 외운다. 하지만 유 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장난감이나 친구 대신이었던 피아노다. ‘민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남자친구로 삼았다. “플루트랑 바람피우는 거냐”고 농담을 던지자 “아니다, 요즘도 피아노를 제일 많이 친다”며 발끈했다.

그런 유 양에게 꿈을 묻는 건 괜한 말을 시키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할 정도다. 답은 망설임 없이 나온다. “피아니스트요.” 이 씨가 물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세상을 비추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비추는데. 플래시 들고 다닐 거야?”

“네, 피아노 플래시. 크크. 슬퍼하는 분들, 가난한 분들한테 제 곡을 들려드리면 빛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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