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효도와 공경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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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두릉(杜陵) 땅에 한씨 성을 가진 처사(處士)가 살았다. 젊었을 때 인근 마을의 노인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러 간 일이 있었는데 날이 저물려 하자 노인이 자고 가라고 붙들었다. 처사가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였으나 노인이 자꾸 권하자 마침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잠시 후 처사는 갑자기 문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더니 한참 후에야 돌아왔는데 이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노인이 이상히 여겨 어찌 된 것인지 묻자 처사가 대답하였다. “저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동구 밖에까지 나와 저를 기다리실 것이 걱정되어 집에 가서 말씀을 드린 뒤에 돌아온 것입니다.” 노인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집에까지 갔으면서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합니다. 처음부터 노모가 기다리신다고 얘기를 했으면 억지로 자고 가라고 권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게다가 밤길이 위험하니 자고 가라고 하신 건데 그 밤길을 나서서, 기껏 집에까지 갔다가, 다시 밤길을 되짚어 돌아온 건 또 뭔가요?

처사가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 그토록 간곡히 자고 가라고 말씀하시니 그 뜻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어찌 풀숲 사이로 오고 가는 것을 꺼려서 어르신의 후의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가 조금도 걱정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마을 어르신의 환대와 후의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처사의 깊은 고민과 배려. 이것이 밤사이 먼 길을 다녀오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른을 대하는 데 있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의건(柳宜健·1687∼1760) 선생의 ‘화계집(花溪集)’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시겠지만 선생이 말하고 싶었던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아, 여기에서 ‘어버이를 모시는 효도’와 ‘어른을 섬기는 공경’에 마음을 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噫! 於此可見其事親事長之盡其心矣). 맹자가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도와 공경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요순은 대성인이지만 그 도는 효도와 공경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처사의 학문이 올바른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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