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구제금융 국민투표”… 그리스 디폴트 초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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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구제금융 30일 종료”… 파국대비 플랜B 준비

토요일인 27일 오전 1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사진)가 긴급 연설을 통해 “(국제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안을 7월 5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TV로 생중계된 이 연설을 본 그리스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고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가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인출했다.

총리의 국민투표 결정은 채권단의 협상안을 거부한 것이자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여부를 국민에게 직접 묻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날 그리스 전역에 있는 5500여 개의 ATM 중 약 35%에 해당하는 2000개에서 현금이 바닥났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 통신은 27일 하루에만 약 6억 유로(약 7530억 원)의 현금이 인출됐다고 밝혔다. 국회의원들도 의사당 내 ATM에서 줄지어 예금을 찾았다.

그리스 정부가 27일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을 거부하고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하면서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에 15억 유로를 갚아야 하는 상환일(30일)이 임박해 이제 사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 국면이 됐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은 27일 긴급회의에서 “7월 5일 국민투표 시행 때까지 구제금융 지원을 연장해 달라”는 그리스의 요청을 거절했다. 예룬 데이셀블룸 의장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선언은 채권단과의 협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라며 “구제금융은 예정대로 30일에 종료된다”고 밝혔다. 이로써 그리스에 대한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30일 지원금 72억 유로를 집행하지 않은 채 종료될 예정이다. 알렉산데르 스수브 핀란드 재무장관은 “유로그룹의 다음 회의는 그리스에 대한 ‘플랜B’(디폴트 영향 최소화 대책)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리스 금융권의 생살여탈권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쥐게 됐다. 그리스 은행권에 대한 긴급유동성지원(ELA)이 끊길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지만 ECB는 28일 열린 긴급회의에서 890억 유로 규모의 ELA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ECB가 ‘생명줄(lifeline)’을 일시에 끊는다면 그리스 은행권은 붕괴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숨을 쉬게는 해줬으나 하루 수십억 유로의 인출 사태에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그리스 정부 관료들은 이날 오후 모여 ‘자본 통제’ 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기업이나 개인이 인출할 수 있는 현금 한도를 설정하고 월요일인 29일을 은행 휴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집중 검토했다. ECB의 ELA 유지 결정에 따라 29일 그리스 은행들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가 진정될지 주목된다.

그동안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한때 긍정적인 신호도 보냈던 그리스 사태는 왜 이렇게 갑자기 악화됐을까. 그리스의 최종 협상안은 22일까지만 해도 유럽연합(EU) 채권단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에 따라 25, 26일 EU 정상회의에서 타결될 것으로 보는 낙관론이 확산됐다.

그러다 IMF에서 연금 및 임금 삭감, 국방비 감축 등 긴축정책을 줄기차게 요구하면서 그리스가 반발하고 나섰다. 치프라스 총리는 120억 유로를 지원하는 채권단의 구제금융 프로그램 5개월 연장안은 “정부 부채만 증가시키고 연말에 더 가혹한 각서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리스 의회는 28일 새벽 국민투표 안건을 찬성 178표, 반대 120표로 승인했다.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에 따르면 27일 카파 리서치의 긴급 여론조사 결과 채권단의 방안에 대해 찬성은 47%, 반대는 33%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의 약 3분의 2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아야 한다고 밝혔다. 여론조사대로 결과가 나온다면 채권단이 신속한 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반면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주도한 연립정부는 실각하고 반년 만에 다시 조기 총선에 의한 새 정부 구성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위기 수습의 가닥이 잡히기까지는 상당한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30일까지 다른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진다. 그리스는 30일 IMF에 15억 유로를 상환해야 하지만 현금이 부족해 상환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 다만 IMF는 회원국의 상환 실패를 디폴트가 아닌 ‘체납’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도 민간 채권자에게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때만 디폴트로 규정하며 IMF나 ECB 등 공공기관의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디폴트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는 7월 20일에는 ECB 부채 35억 유로를 갚아야 하고, 재정증권 만기 연장 실패 등으로 이어져 중기적으로 디폴트가 불가피한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 탈퇴 위험도 커졌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5일 국민투표는 그렉시트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가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을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진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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