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정책성 보험… ‘4대악’ 가입 0건, ‘난임’ 판매 스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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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 보험상품들 표류

“아무리 아이가 걱정돼도 ‘4대 악(惡) 보험’에 가입하는 건 좀 그래요.”

중학교 3학년생 아들을 둔 이모 씨(48)는 학교 폭력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 아들도 언제든지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그러던 중 다른 학부모들에게서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 병원비, 변호사 선임비 등을 지원해 주는 4대 악 보험을 학교를 통해 단체로 가입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선뜻 가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들이 학창시절에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이 보험 기록 등에 남을 게 걱정돼서다.

학교 폭력, 성폭력 등 사회적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개발하는 ‘정책성 보험’들이 표류하고 있다. 정부 부처는 해당 보험 상품의 현실적인 타당성이나 실제 수요를 따져보지도 않고 일단 발표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후속 관리에 신경 쓰지 않고, 보험 업계는 정부 눈치만 보며 땜질식으로 상품을 내놓다 보니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는 것이다.

○ 가입 실적 ‘0’건인 4대 악 보험

25일 보험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7월 4대 악 척결 범국민운동본부와 현대해상이 내놓은 정책성 보험인 ‘행복지킴이 상해보험(일명 4대 악 보험)’은 출시된 지 1년이 됐지만 가입 실적이 ‘0건’이다. 행복지킴이 상해보험은 학교 폭력, 성폭력, 가정 폭력, 불량식품 등 4대 악으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상품이다.

이 상품은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등 단체만 가입할 수 있다.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의 보험이다 보니 정확한 손해율이 책정되지 않는다. 보험회사들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단체 가입을 유도해 왔다.

하지만 현재 전국 17개 시도 교육감 중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있는 서울 경기도 등 13개 지역에서는 애물단지 신세다. 해당 지역의 학교 교장들이 보수 정권이 개발한 4대 악 보험에 가입하면 진보 교육감과 갈등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가입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야당 국회의원들과 야당 지자체장, 교육감 등은 4대 악 보험이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상품 출시에 반대해 왔다.

진보 교육감이 없는 나머지 4개 시도 역시 가입을 주저하긴 마찬가지다. 대구의 한 고교 교감은 “보험에 가입하면 ‘저 학교는 학교 폭력의 온상’이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전국의 어떤 학교도 보험에 선뜻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정권 바뀌면 잊혀지는 정책성 보험

정책성 보험은 보험 상품을 설계할 때 시장조사가 충분치 않다 보니 보험회사가 상품을 만들어 놓고도 시장에 아예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해상이 지난해 12월 만든 ‘난임보험’이 대표적인 예다.

보험업계에서는 “보험은 우연한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가입하는 것이지만 이 보험은 가입자가 자신이 난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가입하기 때문에 보험 상품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보험 심사 시 가입 희망자들에게 부부 간 성관계 횟수 등 사적인 부분까지 물어봐야 하기 때문에 가입을 권유하기도 쉽지 않다.

소비자들도 난임으로 보험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난임 사실을 보험회사에 알려야 한다는 점을 꺼림칙하게 여긴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최모 씨(30·여)는 “여성들에게 난임은 숨기고 싶은 비밀인데 이것을 밝혀가며 보험금을 타기가 꺼려질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5월부터 KDB생명, 농협생명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장애인 연금보험’도 보험 판매 시스템을 잘 파악하지 못해 저조한 실적을 올린 사례다. 이 보험은 일반 연금에 비해 연금수령액이 10% 이상 높지만 가입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키우기 위해 보험설계사의 보수 등을 30% 낮췄다. 그러다 보니 보험설계사들이 이 상품의 판매를 꺼린 것이다.

이기욱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은 “보험설계사들이 상품을 팔아도 수수료를 적게 받도록 만들어 놨으니 누가 적극적으로 판매에 나서겠느냐”고 지적했다.

노후 실손 의료보험은 고령자의 실손 의료비 보장을 위해 가입 연령을 65세에서 75세로 높이고 보험료는 기존 실손 보험의 70∼80% 수준으로 낮췄지만 정작 가입 대상인 일부 노령층이 보험에 가입할 돈이 없는 경우가 많아 판매 실적이 저조하다.

정책성 보험의 특성상 정권이 바뀌면 보험 상품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보험회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리스크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 당시 출시된 ‘자전거 보험’은 2009년 나온 직후 1만6000여 건 판매됐지만 매년 판매 실적이 줄어들어 지난해 판매 실적은 2884건에 그쳤다. LIG손해보험(현 KB손보)은 결국 이 상품의 판매를 중지했다. 자건거보험은 특히 자전거 분실이나 도난은 보장하지 않고 상해만 보장하는 것도 문제였다. 소비자들은 실손 의료보험으로도 상해가 보장되는데 굳이 자전거 보험이 필요하겠느냐며 가입을 꺼렸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은 “정부가 소비자의 수요나 보험 상품의 타당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정책성 보험을 출시하는 게 문제”라며 “정부가 보험이 출시된 뒤에도 꼼꼼하게 관리하고 관심을 가져야 정책성 보험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연상 baek@donga.com·송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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