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숱한 고비 넘기고 생환… 언젠가 빚 갚으라는 산의 뜻”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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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산악인 엄홍길 대장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6개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 그는 이제 인생에서 17번째 등정을 하고있다. 바로 ‘네팔 돕기’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6개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 그는 이제 인생에서 17번째 등정을 하고있다. 바로 ‘네팔 돕기’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산사나이 엄홍길 대장(55)은 소탈하다. 세계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6개를 등정한 사람치고는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를 스스럼없이 “대장님”으로 부른다.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해 준 네팔에 보답하기 위해 만든 재단이다. 4월 네팔에서 강진이 발생한 뒤에는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엄 대장이 네팔에서 지진을 경험한 것은 꼭 27년 전. 1988년 에베레스트 5400m 베이스캠프에서였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3차례나 실패하고 4번째 도전했을 때였다. 당시 베이스캠프에는 미국 스페인 등 10개국 등정 팀이 몰려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텐트 밖에서 “우르르∼ 쾅쾅”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동시에 “애벌랜치(눈사태)! 애벌랜치!” 소리가 급박하게 들렸다. 베이스캠프 밑의 빙하가 갈라졌거나 대규모 눈사태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텐트 밖으로 뛰쳐나와 보니 각국 대원들이 살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눈을 돌려 산 쪽을 바라보니 눈사태와 함께 해일 같은 게 텐트 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순간 다시 텐트 안으로 도망쳤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지나면서 텐트가 찌그러들었다. 얼마 뒤 텐트 문을 열어 보니 돌가루 등이 주변에 수북이 널려 있었다. 눈사태로 인한 후폭풍이었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네팔에 리히터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베이스캠프는 진앙에서 먼 곳이었는데도 지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휴먼스쿨 완공 뒤 어린이들과 함께.
휴먼스쿨 완공 뒤 어린이들과 함께.
그리고 올해 4월 25일, 네팔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찔했다. 자신이 27년 전 경험했던 지진보다 규모가 더 큰 데다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휴먼재단에서 짓고 있는 학교들이 지진피해 지역에 들어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애가 탔다.

“지진이 나기 보름 전 고르카 만드레 지역에서 13번째 학교 착공식을 가졌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지진이 났다. 그 마을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눈에 밟혀 심란했다. 백방으로 뛰며 구호품을 마련하고 현지로 가려던 차에 대한적십자사에서 네팔 구호단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급히 구호 팀 1진을 꾸려 28일 네팔로 날아갔다. 구호품을 전달하고 후속 의료팀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임무였다.”

도착 다음 날부터 바삐 움직였다. 5번째 학교가 있는 ‘다딩 컬레리’ 지역을 찾았다. 해발 2600m에 있는 학교까지는 갈 수 없었다. 도로가 망가져서다. 그곳에서는 환자 이송이 끝나 뒤에 올 의료팀이 할 일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구호품을 전달하고는 다른 베이스캠프 후보지를 찾았다.

‘신두팔촉 처우마라’, 그 마을은 나무로 지은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도로가 끊겨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대한적십자사에 베이스캠프 후보지로 보고했다. 큰 임무를 마친 셈이었다.

그러고는 5월 12일 고르카 만드레 마을로 달려갔다. 대형 트럭 8대와 소형 트럭 3대에 구호품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4시간이나 달렸다. 산간 외딴 마을로 구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 구호품은 휴먼재단이 긴급 지원키로 한 10만 달러와 네팔 돕기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했다. 파라다이스 재단으로부터 2억 원, 등산용품 업체 밀레로부터 텐트 천막 의료품 등 3억 원 상당을 지원받았다.

엄 대장은 만드레 마을에서 네팔에서 두 번째 지진을 경험했다. 사전에 구호품을 받아가라고 알린 까닭에 공터에는 1000명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었다. 구호품은 텐트, 천막, 담요, 생필품 등. 생필품은 쌀과 녹두(네팔의 주식 ‘달’의 재료) 식용유 설탕 소금 등을 5인 기준으로 담아놓았다. 트럭에서 쌀 포대와 구호품을 내리던 순간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을 들었다. 순간 주민들은 계곡 쪽으로 내달렸고, 구호 팀도 급히 그쪽으로 피신했다.

“산의 한쪽 사면이 여러 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연의 위력 앞에 모두 얼이 빠진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구호품을 갖고 간다는 홍보를 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 자연의 뜻이다.”

길이 뚫려 찾아간 다딩 컬레리 마을의 5번째 학교를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대부분의 집이 무너진 마을에서 기적처럼 우뚝 서있는 학교가 대견해 보였기 때문이다. 학교는 이재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주민 260가구에 대한적십자사의 응급 구호품들을 전달했다. 전기가 끊겼기에 솔라판(낮에 태양열을 축적했다가 밤에 불을 켜는 장치)도 전달했다.

네팔 지진 현장에서 엄 대장은 그곳 사람들의 덤덤함에 놀랐다.

“지진 피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하늘도 무심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신의 섭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가족을 잃었는데도 요란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십 년간 히말라야를 수십 차례 오르며 봐오던 정말 순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네팔은 엄 대장에게는 제2의 고향이다. 네팔이 없으면 그의 성공도 없다. 16좌 등정이 현실로 다가올수록 네팔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커져만 갔다. 그가 수많은 죽을 고비 속에서도 무사히 산에서 살아 내려온 것은 다 산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요즘도 첫 술잔은 네 번째 손가락으로 고수레를 한다. 자신을 지켜준 어떤 산에 바친다는 뜻이다.

드디어 2007년 5월 로체샤르 8400m 등정에 성공했다. 16좌 등정의 완결판이었다. 한동안 그는 성공에 도취했다. 자승최강(自勝最强),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강한 것이다’라는 그의 좌우명이 이뤄진 순간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산에서 지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85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한 이후 22년 동안 히말라야 등정에 38차례나 나섰다. 그중 16좌를 포함해 20번만 등정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동료 10명을 잃었다. 사고가 나는 날을 되짚어보면 욕심을 부린 날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산은 알면 알수록 두려운 대상이다. 그 안에는 크레바스도, 낙석도, 추위도, 폭풍도, 제트기류도 숨어있다. 히말라야 고봉 어느 모퉁이, 어느 고비에서건 두려움에 떨지 않은 적이 드물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면서 산은 늘 한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 ‘여기를 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한 걸음, 한발자국 내디뎠다. 그 한 걸음이 나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산 하나를 오르는 것은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행운도 뒤따라야 한다. 체력 기술력 경험이 뛰어나도 보이지 않는 기운, 뭔가의 도움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성공에 도취해 지내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상을 오르며 여러 차례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수많은 동료를 잃고도 나를 살려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빚을 갚자.’ 엄 대장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했고, 도움을 받았다. 결국 재단 형태로 꾸려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실 비용과 컴퓨터 마련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돈이 떨어졌다. 파라다이스 재단에서 특별공로상과 상금 4000만 원을 주겠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시상식 날 “16좌 등정 성공은 먼저 간 동료들과 셰르파 덕분이다. 상금을 거기에 쓰겠다. 휴먼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이듬해 5월 엄홍길 재단이 세워졌다.

재단은 네팔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정했다.

“히말라야 등정 때 만난, 추위에 두 볼이 빨개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생각났다. 제대로 된 교육과 의료 시설도 없는 곳에서 부모가 살던 것처럼 가난을 대물림 받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일시적인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부모처럼 포터와 셰르파로 사는 게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게 바로 학교였다.”

선배 등반가 그레그 모텐슨이 쓴 책 ‘세 잔의 차’도 영향을 미쳤다. K2 등정에서 조난당했다가 산골마을 사람들과 차 세 잔을 마시고 가족이 되어 80여 개의 학교를 세운 그레그 모텐슨의 감동실화였다.

1986년 2차 에베레스트 원정 때 숨진 셰르파 ‘술딤 도루지’의 고향 팡보체에 세운 휴먼스쿨은 ‘네팔 빚 갚기’의 첫 단추였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 고봉을 떠났지만 이제 인생에서 17번째 등정을 하고 있다. 어쩌면 히말라야 등정보다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초조하지 않다. 히말라야 등정 때 한걸음에 30cm씩 걷다보면 어느 새 정상에 오른 것처럼, 힘들지만 한 발 한 발 내디디면 목표에 다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등반 대장으로 등정 팀을 꾸릴 때는 적어도 2억 원 이상이 든다. 매번 아등바등하며 돈을 모으려면 힘들 때도 많았지만 갈 때쯤 되면 어떻게든 돈이 모여 있었다. 재단 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그가 어떤 아버지인지도 궁금했다. 돌아온 답은 “빵점 아빠”였다. 하지만 그가 2000년 칸첸중가 바위벽에 붙어 썼다는 ‘지은아, 현식아’로 시작하는 유서에는 그의 자식 사랑이 오롯이 담겨 있다.

‘아빠가 결국에는 산에서 잠들게 된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겠느냐… 아빠를 원망도 할 것이다… 너희가 어른이 됐을 때는 아빠의 도전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 잘 모시고 잘살길 바란다.’

네팔을 다녀온 엄 대장은 곧 네팔에 닥쳐올 장마에 마음을 끓이고 있다. 그는 올가을에는 네팔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다.

엄홍길 휴먼재단이 첫 번째로 세운 학교 ‘팡보체 휴먼스쿨’.
엄홍길 휴먼재단이 첫 번째로 세운 학교 ‘팡보체 휴먼스쿨’.
▼16좌 오르듯… 16번째 휴먼스쿨 향해 한발 한발▼

네팔에 학교 지어주는 엄홍길


엄홍길 휴먼재단은 네팔에 학교 16곳을 지으려 한다.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6개를 세계 처음으로 오른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학교 이름은 ‘휴먼스쿨’. 현재 8곳을 완공했고, 4곳은 건설 중이다. 지난달 고르카 만드레 마을에 13번째 학교를 착공했다.

첫 번째 휴먼스쿨은 에베레스트 길목 4060m 고지 마을 팡보체에 세웠다. 1986년 에베레스트 2차 원정 때 숨진 셰르파 ‘술딤 도루지’의 고향 마을이다. 워낙 고지대여서 건축자재를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 멀리 산 아래 마을까지 경비행기로 건축자재를 갖다놓은 뒤 다시 소의 일종인 야크에 싣고 올라가는데 3박 4일이 걸렸다. 수송비가 만만찮았다. 자재가 떨어지면 공사가 며칠씩 중단되기도 했다. 2009년 5월에 착공해 꼭 1년 만에 완공했다. 학생 53명이 배우고 있다.
휴먼재단이 학교를 지을 때 고집하는 원칙이 있다. ‘기후에 맞게, 지형에 맞게.’ 고산지대여서 난방을 할 형편이 못되는 만큼 단열에 힘썼다. 벽과 천장, 심지어 바닥까지 단열재를 넣었다. 화장실은 반드시 남녀를 구분해 지었다. 여학생들이 여자 화장실이 없어 학교 가기를 꺼린다는 말을 들었던 때문이다. 교실 창문은 되도록 넓게 냈다. 네팔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룸비니의 평야지대에 지은 3번째 학교는 침수에 대비했다. 지반을 70cm 정도 더 높이고 다졌다. 바람이 잘 통하게 천장을 높게 하고 테라스도 만들었다.

학교 하나 짓는데 보통 2억∼3억 원이 든다. 주위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등산용품업체 밀레에서 2개 학교 건설비를 후원했고 현대오일뱅크 신세계조선호텔 롯데홈쇼핑 하나은행 기업은행 AIA생명 인텔 KOICA 라이온스354B지구 화엄군포교후원회 DK-LOK도 참여했다. 일반 후원자들은 책걸상과 교복, 학용품 등을 지원했다.

6번째 학교는 ‘굿웨이 위드 어스’를 운영하는 개인사업가의 후원으로 지었다. 이 사업가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네팔 의료봉사를 같이 했다. 아들에게 세상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네팔에 다녀온 뒤 용돈의 절반을 후원하겠다면서,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모금도 했다. 나머지 대부분을 아버지가 보태 학교를 지었다.

휴먼스쿨은 초창기에는 50명 정도를 수용했으나 8번째 휴먼스쿨은 550명이나 될 정도로 커졌다. 10번째 학교는 688명 규모. 휴먼재단이 학교를 튼튼하게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신청 마을도 늘어났다. 휴먼재단 네팔지부는 신청 마을을 대상으로 수차례의 현지답사와 비교심사를 통해 학교 지을 마을을 선정한다. 먼저 학생들이 늘어나는 곳인지를 본다. 학교 터는 네팔에서 제공하는 것이 조건. 학부모들에게는 터다지기나 노력 봉사를 요구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닐 학교에 애착을 갖게 하자는 뜻이다.

후원문의: www.uhf.or.kr, 02-736-8850
:: 엄홍길 약력 ::

▽1960년 9월 14일(음력) 경남 고성 출생 ▽동두천 양주고 졸(1979)-한국외대 중국어과 학사(2006)-한국외대 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2010)-경희대 체육대학원 박사과정 수료(2012) ▽상명대 전 석좌교수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밀레 기술고문 ▽현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 ▽현 소방방재청 국민안전정책자문위원 ▽현 국민생활체육회 이사

▼히말라야 16좌
등정 기록 ▽에베레스트(8848m·1988, 2002, 2003, 2005) ▽초오유(8201m·1993) ▽시샤팡마(8027m·1993, 2001) ▽마카루(8463m·1995) ▽브로드피크(8047m·1995) ▽로체(8516m·1995, 2001) ▽다울라기리(8167m·1996) ▽마나슬루(8163m·1996) ▽가셔브룸Ⅰ(8068m·1997) ▽가셔브룸Ⅱ(8035m·1997) ▽안나푸르나Ⅰ(8091m·1999) ▽낭가파르바트(8125m·1999) ▽칸첸중가(8586m·2000) ▽K2(8611m·2000) ▽얄룽캉(8505m·2004) ▽로체샤르(8400m·2007)

▼저서 ▽8000m의 희망과 고독(2003)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2008), 불멸의 도전(2008)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2010) ▽내 가슴에 묻은 별(2012)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1989) ▽체육훈장 맹호장(1996) ▽한국유네스코 서울협회 올해의 인물(2000) ▽제2회 대한민국 산악대상(2001) ▽체육훈장 청룡장(2001) ▽파라다이스상 특별공로 부문(2007) ▽제10회 4·19 문화상(2010)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2012) ▽자랑스런 대한국민 대상(문화체육대상 국위선양부문·2013)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엄홍길#엄홍길 휴먼재단#팡보체 휴먼스쿨#네팔#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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