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역풍 맞은 문단권력 창비, ‘신경숙 표절’ 꼬리 내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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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이른바 ‘문단 권력’으로 불려온 출판사 창비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쏟아지는 독자들과 문인들의 비판에 굴복했다.

18일 창비는 강일우 대표이사 명의로 창비 홈페이지 등에 게재한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전날) 보도자료는 ‘표절이 아니다’라는 신경숙 작가의 주장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면서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이 내용과 구성에서 매우 다른 작품이라는 입장을 전하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들이 느끼실 심려와 실망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을 담아야 했다”고 했다.

강 대표는 이 글에서 “17일 본사 문학출판부에서 내부 조율 없이 적절치 못한 보도자료를 내보낸 점을 사과드린다”고 했다.

창비의 입장 변화는 독자와 문인, 평론가들의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지만 출판계 안팎에서는 “경박하고 기회주의적이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애매한 표현이나 명백한 사과가 아닌 적절치 못한 보도자료를 낸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 때문이다.

하지만 출판사 대표 A 씨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을 대표이사와 상의 없이 문학출판부가 자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백낙청 편집인의 허락을 받고서 창비와 편집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어 ‘창비 문학출판부’ 명의로 낸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출판사 대표 B 씨는 “창비가 과거 SNS가 없던 시절처럼 출판사와 평론가만 덮어주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자료를 냈다가 화들짝 놀란 것 같다”며 “백 편집인을 위시로 수직의사결정 구조로 이름난 창비에서 내부 조율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코미디’”라고 했다. 한 창비 관계자는 “(기자가) 다 알 거 아니냐. 더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출판계에선 창비가 자사 직원들을 동원해 신 씨의 소설 표절 논란과 창비의 입장에 대한 분위기를 살피고, 소설가 이응준 씨가 표절 논란 의혹을 제기한 이유를 알아봤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불과 하루 만에 창비가 한발 후퇴한 입장을 밝힌 것은 거센 비난 여론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비는 전날 표절이 의심되는 대목을 두고 “(신 씨의)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고 해명했다가 질타를 받았다. 창비 홈페이지에는 수십 개의 글이 올라왔다. 게시글에는 ‘창작과 비평이 아닌 표절과 두둔’ ‘일개 기업으로 전락한 창비, 스스로 망조의 길로 들어서다’ ‘이참에 출판사 이름도 바꾸라’ 등 비난 일색이었다. 트위터, 페이스북에도 비난 여론과 함께 ‘창피하다’ 대신 ‘창비하다’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문단에서는 소설가 장강명 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게 표절이 아니라면, 한국 소설은 앞으로 짜깁기로 말라죽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학평론가 오길영 충남대 교수는 “창비마저도 문학의 시장논리에 굴복하는구나 싶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출판사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시장논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시장논리만을 중시하는 태도가 문제란 뜻이다”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내부 직원으로 추정되는 창비직원A(@unknownmembera)는 트위터에 “내년은 창작과비평이 세상에 나온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위해 곳곳에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과 관련해 처음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모두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창비는 이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고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언제나 공론에 귀 기울이겠다”는 의견도 밝혔다. 김명인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표절 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고 가이드라인과 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그보다 앞서 창비뿐 아니라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도 자사에서 책을 내는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봉쇄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년 50주년을 맞는 창비는 문학과지성사와 함께 한국 문학의 요람으로 불렸지만 2000년대 들어 문단 권력으로 군림해 문단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문단 권력#창비#표절#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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