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강수진]평생 웬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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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문화부장
강수진 문화부장
“낱말을 설명해 맞히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웬수/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아니 네 글자/평생 웬수….”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노부부의 실제 에피소드를 소재로 쓴 황성희 시인의 ‘부부’다. 맞다, 천생연분으로 만난 부부는 평생 웬수다. 원한 맺힌 사이는 원수지만 부부처럼 볼 거 안볼 거 다 겪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린 사이는 웬수다.

이렇게 일상을 나누는 부부의 모습을 문정희 시인은 “부부란/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부부’)라고 했다.

그런데 ‘평생 웬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대법원 통계를 보면 결혼 20년 이상 된 중장년 부부의 황혼 이혼이 전체의 30%를 넘어섰다. 결혼식 주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 표현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라던데 이젠 파뿌리 되도록 살고도 갈라서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일까. 가정의 달 5월에 ‘부부의 날’도 있다. 둘(2)이서 하나(1) 된다는 의미에서 21일이다. ‘화이트데이’니 ‘빼빼로데이’니 하는 국적불명의 날처럼 마케팅의 산물이려니 했는데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엄연한 법정기념일이다. 2007년 법정기념일이 됐지만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주변 남자들 반응은 “그런 날도 있느냐”로 시작해 “결혼기념일과 아내 생일만으로도 벅찬데 이젠 부부의 날까지 챙겨야 하느냐”로 이어졌다).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다큐멘터리지만, 관객이 본 건 판타지다. 하루 평균 300쌍 넘게 이혼하는 시대에, 98세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가 76년간 해로한 모습에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최근 ‘님아…’는 책으로도 출간됐는데 말미에 실린 대담에서 감독과 평론가는 노부부의 해로 비결을 이야기한다. 그간 수많은 부부 상담 전문가들이 권한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몇 가지 공통점은 이렇다,

▽존경=서로 ‘할아버지’ ‘할머니’(영감, 할망구가 아니다)라 부르며 존대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칭찬=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수시로 ‘인물이 훤하네요’ 하고, 할아버지는 밥 먹고 믹스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할머니” 하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스킨십=노부부는 어딜 가든 둘이서 꼭 손을 잡고 다닌다.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머니 살이 닿지 않으면 잠이 안 와”라고 한다(!)

이런 비결이 꼭 부부 사이에서만 필요한 건 아닐 거다. 공생이 아닌 투쟁과 척결의 대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노사, 툭하면 막말을 주고받는 여야 등 파트너십이 필요한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오늘은 부부의 날이다. 주례사에서 종종 인용되곤 하는 함민복 시인의 ‘부부’는 결혼생활을 함께 맞드는 ‘긴 상’에 빗댔다. 부부들뿐 아니라 일자리라는 ‘밥상’을 나누는 사람들, 대한민국이라는 소중한 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우리 모두가 읽어보면 좋겠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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