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2015]영감 잡아내는 안테나, 칼처럼 갈고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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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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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전민석 씨
전민석 씨
가수 이상은은 자신을 안테나에 비유한다.

예술가는 허공중에 떠도는 좋은 영감을 잡아내 수신해주는 라디오다.

그래서 그녀는 ‘영감을 잡아낼 수 있는 안테나가 녹슬지 않도록 남보다 부지런을 떠는 편이다’.

여기 낡고 투박한 라디오가 하나 있다. 귀에 거슬리는 거친 잡음만 탄식과 한숨소리처럼 끊임없이 뱉어내던 고물 라디오.

요 몇 달간은 날씨가 좋아서인지, 녹슬고 휘어진 안테나가 우연히 지나가던 바람의 도움을 얻어 제 역할을 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니 라디오를 버리지 않고 품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8할이 바람 탓이다. 어쨌든 이 라디오를 들고 여행을 떠나게 됐다. 이왕 떠나는 마당에 결심을 새로 한다.

안테나를 칼처럼 갈고 닦아 허리춤에 차야겠다.

부러 여행담을 듣고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속여 파는 장사꾼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한없이 가벼운 나비처럼 날아다니다가, 언제라도 그들이 원할 때 날개처럼 안테나를 펴고 좋은 노래 한 곡 들려줄 수 있는 라디오.

일단은 그것이 내가 꾸는 꿈이다.

오래 인사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싶다. 간혹 내가 죽은 것은 아닌가, 나조차 의심할 때 내 삶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 한 번 더 라디오를 들어보고 싶다고 웃어준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80년 경기 안양 출생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 △2001년 경장편 소설 ‘모텔 선샤인’ 출간
은희경 씨(왼쪽)와 구효서 씨.
은희경 씨(왼쪽)와 구효서 씨.
▼[심사평]환상적인 완급 조절… 말-화면-글 3박자 갖춰▼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었다. 대부분 기본을 갖추었고 장점도 있었다. 다듬어진 문장력, 이야기를 풀어 가는 솜씨, 적절한 에피소드의 포착. 그러나 몇 가지 단점이 두드러졌다. 단편에 맞는 소재를 늘려서 쓰면 글이 늘어지고 산만해지기 쉽다. 또한 절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힘을 주기보다 오히려 빼야 할 것이다. 분위기 있게 쓰고 싶다면 작가의 머릿속은 글로 표현된 것보다 몇 배 더 명료해야 한다. 확실히 알고 쓰는 이야기가 아니면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박봉호의 ‘염소의 시간’은 독특하고 의욕적인 작품이지만 작가가 소재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난해하다기보다 난삽한 느낌을 준다. 송혜리의 ‘타르의 맛’은 주제에 접근해 가는 솜씨가 돋보이지만 정제되지 않은 자의식의 직설적 표출이 불편했다. 주인공이 겪는 아픔에 몰입되지 않는 것은 예상을 벗어날 만한 새로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최설의 ‘삼천포에는 여자 이발사가 없다’는 개성이 뚜렷한 화법으로 능숙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단편으로 압축해야 할 단순한 스토리 라인인 데다, 부조리한 세상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전복적 유머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한바탕 소극으로 끝나 버린 듯하다.

김보배의 ‘지워지다 그린’과 김현경의 ‘이완의 자세’와 전민석의 ‘다른 나라에서’는 출구 없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혼란, 조각난 삶을 그렸다. 셋 다 공감력이 높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러나 앞의 두 편은 중편소설이 가져야 할 볼륨감이 약하고 설정과 전개 또한 소박하거나 뻔하다. 이야기를 풀어 놓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적인 감수성이나 새로운 관점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남녀가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헤어나지 못하는 출구 없는 세상을 아프고 서늘하게 그려 냈다. 시각적이고 스피디하면서도 완급 조절이 잘되어 전개에 무리가 없다. 대화는 재치가 넘치면서도 절제돼 있고, 캐릭터 또한 인상적이지만 과격하지 않고 설득력과 흡인력을 갖추었다. 말과 화면과, 그리고 글이 모두 갖춰진 작품이다. 크게 축하하고 싶다.

구효서·은희경 소설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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