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현장취재) 제1회 멍때리기 대회 “현대인들의 뇌는 쉬어야 한다”

  • 입력 2014년 11월 12일 15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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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때리기 대회
현대인들의 뇌는 쉬어야 한다

지난 10월 27일 월요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제1회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나이, 성별, 직업을 불문하고 멍때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50명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신청서를 내고 3:1의 경쟁률을 뚫고 대회 참가 자격을 얻은 선수들이었다

EDITOR 곽은영 PHOTOGRAPER 권오경

50명의 대회 본선진출자가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50명의 대회 본선진출자가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스트레스 쌓인 직장인, 공부에 지친 수험생, 쉬다가 과로사 한다는 백수·백조까지. 평소 멍때리기의 달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치열한 경합 가운데, 세 명의 탈락자와 한 명의 기권자를 낳으며 대회는 말없이 이어졌다”



멍때리기 대회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들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열렸다. 본 대회는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가 주최하고 공정한 심사기준과 진행을 위해 황원준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자문을 얻어 진행됐다.

여기서 ‘전기호’란 오로지 닉네임으로만 활동하는 웁쓰양과 저감독이 서울광장 멍때리기 대회 개최를 허가받기 위해 만났던 서울시 담당 공무원의 실명이다.

본 대회의 체험을 허락받은 에디터는 대회를 나흘 앞두고 전기호의 멤버인 웁쓰양으로부터 대회 시간 변경과 복장에 대한 공지 메시지를 받았다.

드디어 10월의 마지막 월요일,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많은 카메라와 시민들이 요가 매트가 깔린 본대회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놀랐다.

입구에서 이름을 밝히자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앉아 있던 스태프가 참가자 리스트를 확인하고는 등번호를 고르라고 했다. 뒤쪽에 앉고 싶어 47번이나 49번을 고르려고 했더니 그 번호는 이미 다른 사람이 선택했으며 번호대로 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다고 알려줬다. 17번을 선택해 번호표를 등과 가슴에 부착하고 난 뒤, 심장박동 측정기로 심박수를 재고 입장했다.

에디터 역시 17번을 달고 대회에 참가했다
에디터 역시 17번을 달고 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의 이색적인 코스튬


비어있는 요가매트에 가서 앉으니 왼쪽으로 32번 등번호를 달고 선글라스를 낀 50대 남성이 눈에 띄었다. 본 대회는 1시부터 시작이라 시간이 꽤 남아 서로 인사를 하고 멍때리기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그 남성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었다. 점심시간의 시청역 광장은 그에게 무척 불리한 곳이었다.

“회사는 땡땡이치고 왔어요.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튀어 보이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하지 않고 놓친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대회는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됐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하게 됐어요. 하고 보니 제가 첫 번째 신청자였어요.”

이번에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등번호 42번의 여대생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가 긴 20대 초반의 여대생은 멍을 왜 때리는지 묻는 질문에 조용히 “복잡할 때 멍을 때리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게 느껴지거든요”라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에서부터 군인, 패스트푸드점 직원, 이마에 빈디를 붙인 인도학과 학생, 모자를 쓴 어린아이,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까지 참가자들이 각자 다양하고 재미있는 코스튬을 해왔다. 대회 도중 시계를 보거나 핸드폰을 보면 탈락하기 때문에 팔목에 있던 시계부터 풀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소리의 궁금증을 못 이긴 참가자는 결국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소리의 궁금증을 못 이긴 참가자는 결국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심박수 안정적인 사람이 멍 잘 때리는 사람


본 대회가 열리기 5분 전, 기혈체조 창시자 월선 선생을 따라 ‘멍때리기 氣체조’를 했다. 이윽고 호루라기 소리가 나고 멍때리기 대회가 시작되었다. 멍때리기 대회는 철저히 묵음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모든 행사 내용은 두 명의 진행자가 앞에 서서 펼쳐 보이는 두루마리를 통해 안내되었다.

호각소리가 들릴 때마다 전방의 텍스트가 가로로 열렸다. 멍을 때리는 중간중간에는 주최 측 요원들이 심박을 재갔다. 정해진 분 단위로 심박을 체크해 그래프로 연결하면 대회를 진행하는 동안 선수의 심신이 얼마나 편안했는지가 한 눈에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회를 하는 중에는 미리 나눠준 빨강, 노랑, 파랑 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빨강은 안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카드이고, 파랑은 음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카드였다. 노랑은 기타 불편사항들, 예를 들어 겉옷을 벗고 싶을 때나 허락을 구해야 하는 행동을 할 때 사용되었다.

사전에 나눠준 유인물에는 우승자 선정 시 동점자가 나올 경우 이 카드 사용자에게 가산점을 준다고 명시돼 있었는데, 그 이유는 카드 사용을 통해 안마나 음료섭취 등 멍 때리는데 방해가 되는 행동을 선택했음에도 심박이 안정돼 있다면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선수가 멍을 잘 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란다.

대회 우승자는 이러한 심박 기록과 시민투표의 합산으로 결정됐다.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는 아홉 살 어린이

경기 도중 잡담, 독서, 낙서, 취침, 춤, 노래, 휴대폰 사용 등 상식적인 멍때리기 행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주최 측 요원들에 의해 경기장에서 질질 끌려나가게 되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총 세 명의 탈락자와 한 명의 기권이 나왔다.

대회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카운트다운과 호루라기 소리로 경기가 끝나고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짧아 아쉬웠다는 의견이 많았다.

우승자 9살 아이는 우승 비결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이라 밝혔다
우승자 9살 아이는 우승 비결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이라 밝혔다

우승은 아홉 살 여자아이에게 돌아갔다. 1등에겐 ‘갓을 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트로피가 수여되었다. “멍때리는 것이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하던 그 어린이는 엄마가 멍때리기 대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아이 엄마는 “아이가 평상시 학원에 다닐 때도 멍을 많이 때려 학원을 줄였을 정도”라고 전했다. 에디터는 대회 시작 전 타 매체 기자로부터 “멍때리기란 과연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받고 열심히 무엇일 것이다 하며 대답을 했는데, 대회가 끝나고 보니 이런 질문도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때리기는 그냥 멍때리기인 것이다. 대회 때 만난 42번 여대생처럼 멍을 때리고 머릿속의 뭔가가 정리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게 아닐까.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com ), 취재 곽은영 기자, 사진 권오경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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