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이문열의 ‘삼성 진지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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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방영된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은 재벌 2세와 가난한 여주인공의 사랑이 불러온 비극을 담고 있다. 조인성 소지섭 하지원이 출연해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다. 극중에 “계급은 중세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이탈리아 공산당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책 ‘옥중수고’가 등장한다. 작가는 그 이유를 “불공평한 세상에 반감을 가진 캐릭터를 그려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우리는 이 자의 두뇌를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항거했던 그람시의 재판에서 나온 판결이다. 하지만 긴 옥중 생활에도 그의 두뇌는 멈추지 않았다. 그 결실인 ‘옥중수고’에 기동전(機動戰) 진지전(陣地戰) 개념이 나온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는데 서구 유럽에선 왜 그러지 못했는지를 연구한 끝에 나온 이론이다. 제정 러시아처럼 낙후된 사회에선 군대 경찰을 공격하는 기동전으로 체제를 단숨에 엎을 수 있지만 자유주의와 시민사회가 발전한 서유럽에선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그 대신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 즉 ‘진지전’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 씨가 최근 삼성 사장단회의의 강연에서 그람시의 ‘진지론’을 거론한 것이 화제다. 그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은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이면서 동시에 진지의 역할도 해야 한다”며 다양한 지식인, 예술인 계층과 적극적 소통을 강조했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의 수혜자인 삼성이 산업 분야를 넘어 문화적 헤게모니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 씨는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보위하는 진지들은 그동안 많이 함락되고 초토화됐다”고 말한 바 있다. 좌파 진영이 문화 권력의 주도권 다툼에서 공고히 진지를 다진 결과다. 문단에서 작가가 자신의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는 일은 큰 각오 없이는 힘들다. 좌우 어느 쪽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더라도 독선적 사고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발리에서 생긴 일#진지론#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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