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영해]최치원의 좌절과 박근혜 人事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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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기의 석학 최치원(857∼?)은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가던 중 해운대에 들렀다가 절경에 심취돼 한참 머물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해운대 앞바다 동백섬 남쪽 암벽에 자신의 호 ‘해운(海雲)’을 붙여 ‘해운대(海雲臺)’라고 새겼다. 부산의 명소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6월 베이징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를 인용해 화제를 모았다. 시진핑은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님은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라는 시를 쓰셨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교류가 유구함을 최치원의 뛰어난 문장으로 풀어낸 것이다. 최치원은 868년(신라 경문왕 8년)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7년 만에 당나라의 빈공과(외국인 자격으로 보는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한 인물로 경주 최씨의 시조다.

▷그가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반란을 일으킨 황소가 읽고 혼비백산해 줄행랑을 쳤다는 명문이다. 29세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학식과 경륜을 펼쳐보려 했으나 신분제의 높은 장벽에 좌절한다. 지방 호족세력의 발호와 진골 귀족의 부패를 막기 위해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지만 기득권층의 노여움만 샀다. 신라가 배출한 걸출한 인재임에도 나이 마흔에 공직을 떠나 은둔의 길을 걷는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최근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서 ‘미탄(味呑)’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굴했다. 삼국유사는 최치원의 옛집 ‘독서당(讀書堂)’이 미탄사 바로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계는 문헌으로만 전해온 신라시대의 미탄사와 독서당의 위치를 확인한 것을 크게 반기고 있다. 최치원에게 6두품으로는 최고 관등인 아찬 벼슬을 준 진성여왕이 그를 더 큰 자리에 중용했더라면 통일신라가 그토록 쉽게 쇠락의 길을 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무총리 인사로 온 나라가 홍역을 앓는 요즘, 시무책을 내놓은 최치원 같은 인재를 어디 찾을 수 없을까.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최치원#토황소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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