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9년간 친부에게 학대-성폭력 고통’ 은수연 작가가 말하는 상처와 극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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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희망찾은 삶
고통겪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되었으면…

아직은 얼굴을 모두 드러낼 정도로 용기가 없다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해 옆얼굴을 찍었다. 그녀는 “언젠가 얼굴을 당당히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아직은 얼굴을 모두 드러낼 정도로 용기가 없다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해 옆얼굴을 찍었다. 그녀는 “언젠가 얼굴을 당당히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4월 16일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아동학대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참사 닷새 전인 4월 11일 8세 의붓딸을 폭행해 숨지게 한 ‘울산 계모사건’ 피고인 계모에게 1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되고 둘째 딸을 학대해 죽인 후 12세짜리 큰딸에게 누명을 씌운 일명 ‘칠곡 계모’에게도 10년이 선고되자 여론은 형량이 너무 낮다며 재판부에 비판 여론을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대재난에 묻혀버렸지만 아동학대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관련해서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없을까 찾다가 2012년 친족 성폭력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낸 은수연(필명·39) 작가와 연락이 닿았다. 은 작가는 9년간 친부(親父)에게 학대와 성폭력에 시달리는 지옥 같은 성장기를 보내며 몸과 영혼이 파괴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처절한 내면의 고통을 딛고 스스로 이를 극복하며 이제 같은 경험을 한 다른 이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와의 대면과 전화 인터뷰는 5월 한 달간 여러 차례 걸쳐 이뤄졌다. 처음 만난 날은 ‘세월호 참사’로 실종자 수색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그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뉴스를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소식이 궁금해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제가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악마였습니다”

그는 태어나 철이 들 무렵부터 9년 동안 친부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4년 여름, 집에서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는 가출 후 마음 속 고통이 너무 심해 집단심리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너도나도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마음고생을 했는지 토로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도통 남의 고통이 와 닿지 않았다고 한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를 뒷자리에서 삐딱하게 쳐다보면서, 사과를 베어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게 무슨 고민이니?’란 표정으로.

은 작가는 “내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이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의 부모는 몇 차례 헤어졌다 재결합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와 오빠는 친할머니 집에 맡겨졌는데, 학대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친할머니는 당시 7세밖에 안 된 손녀에게 빨래와 집안청소를 시키며 제대로 못한다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옷을 모두 발가벗겨 놓고 벌을 세운 적도 있었다. 당시 은 작가의 모친은 생업전선을 뛰느라 주말에만 왔다. 친할머니는 혹시라도 자신의 학대 사실이 알려질까봐 은 작가의 모친이 오는 날에는 부엌집기로 입을 쑤시면서 ‘말하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은 작가의 기억 속 어머니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호랑이에게 살점을 뜯어 먹히는 토끼의 이미지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목사였는데 밥 먹기 전에는 꼭 기도를 했다. 때로 아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느끼면 “지금 아버지를 무시하는 거야?”라며 갑자기 얼굴을 때렸다. 은 작가가 자라면서 폭력의 형태와 도구는 다양해졌다. 연탄집게, 혁대 등 집안에서 잡히는 모든 물건이 흉기였다. 아버지의 학대는 폭력과 폭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성폭력까지 시작됐다.

아버지는 집 밖과 안에서의 행동이 달랐다. 중고교 때 딸을 등하교시켜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다정한 아빠”라고 칭찬도 했다. 딸이 청소년 쉼터나 경찰서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인 줄 모른 채 말이다.

은 작가는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받은 학대의 충격을 ‘지진’에 비유했다.

“부모는 나한테 양분을 주고 지탱을 해주는 땅과 같은 존재인데, 그 땅이 불안하고 흔들리면서 내 자신을 집어삼켰다. 사람들에게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호소하면 ‘왜 그 집에서 나오지 않았니’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 내가 기댈 곳은 누구도 없다는 생각에 극심한 대인공포증에 시달렸다.”

그는 계모를 감싸고 ‘내가 동생을 죽였다’고까지 거짓증언을 한 칠곡 12세 소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도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맞아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굴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빠는 갑자기 안방으로 달려가 열심히 청소를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내가 잘하면 혹시 부모님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라면서 묵묵히 방바닥을 쓸고 닦았다.”

‘내가 얘 부모’라는 말 한마디의 위력

가정은 은밀하다. 은 작가는 “사회적으로 ‘아빠’ ‘엄마’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는 우리 문화에서 아동학대 피해자들은 쉽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어렵사리 청소년 보호시설을 찾아갔을 때 일이다. 상담학을 전공했다는 여교수는 성폭력을 당했다는 그의 말에 고작 조언해준다는 말이 “집에 가서 방문을 잠그고 자라”는 거였다. 이어 여교수는 은 작가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결국 아버지가 그를 집으로 끌고 갔다.

또다시 도망을 갔을 때였다. 서울 종로의 조그만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낸 아버지가 큰길 한복판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갔다. “도와 달라”는 외침에 돌아보던 사람들은 “내가 얘 애비인데 가출해서 데려오는 것”이라는 말에 다들 움찔 멈추고 말았다. ‘친부모’라는 말은 마법과도 같은 말이었다.

여전히 반복되는 아동학대 문제, 친족 성폭력 문제에 대해 그는 ‘주위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마지막 끈 같은 존재가 부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학대를 당해도 잘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고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심리적으로든 행동으로든 드러낸다. 단 한 명의 교사라도, 단 한 명의 사회복지사라도, 단 한 명의 의사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이는 살 수 있다.”

“가해부모에 대한 형량 너무 가볍다”

그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몇몇 사람들의 도움과 믿음 덕분이었다. 어느 날 가출해 뛰쳐나갔는데, 어떤 부부와 할머니가 탄 차가 그를 태워 준 것. 그는 “제발 경찰서에 데려다 달라”고 호소했다.

경찰관은 편하게 진술할 수 있도록 여자경찰을 불러주었고 “네 아버지는 사람도 아니다”라면서 용기를 주었다. 아버지는 구속되었고 당시에 막 시행되었던 ‘성폭력 특별법’에 따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풍토상 7년형도 무거운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해줬다.

이 대목에서 인터뷰 내내 당찼던 은 작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친부가 감옥을 간 뒤 7년째 접어들 때의 경험을 들려줬다. 곧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 한국에 살고 있으면 언젠가 자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다. 두려움에 떠는 자신이 싫어서 아예 교도소를 찾아가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도 질러보았다. 한동안 벽에 등을 기대야만 안심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자세로 있어야 뒤에서 칼로 찔리지 않을 것 같아서다.

피하고 싶은 것은 더 불행하게 다가오는 걸까. 친부가 출소한 후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회사 사람들과 워크숍을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멀리 아버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고발하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가진다. 나 때문에 부모가 감옥에 갔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소한 미성년인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갈 때까지 가해자들을 가둬줬으면 좋겠다. 일곱 살에 학대를 당했는데, 학대자가 10년 뒤에 나와 봤자 여전히 그 아이는 어리고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외국에서는 1000년형 판결도 나오는데 우리는 너무 형량이 가볍다.”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집에서 탈출한 후 20년. 그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하여 열심히 일도 했다. 은 작가는 2012년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을 내면서 가정 내 학대문제, 친족간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2013년 전국에서 온 판사 120명이 참여하는 간담회에도 초청받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북 굿네이버스의 주관으로 그룹 홈에 사는 아이들 앞에서 멘토가 되기도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는 ‘올해의 여성운동상’도 2013년 받았다. 친부로부터 학대와 성폭력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최근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복지와 아동여성문제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겠다는 꿈이다. 비슷한 상처를 받은 학생들로부터 e메일이나 상담요청을 받으면, 나름대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답변을 해주지만 가슴속 한구석에서는 답답함을 느꼈다.

“힘없고 목소리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게 부모복은 없었지만 그 이후에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지금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면, 지옥 같은 고통을 겪은 내가 평범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 사회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나도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인터뷰=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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