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경찰아저씨가 잡아간다” 흔한 말에도 아이는 상처받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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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2부>당신을 죽이고 살리는 말
무심코 쓰는 말, 부메랑 된다

※ 다음 문제를 풀어 보자.

<문제> 다섯 살 남자아이 민서가 세 살 남동생 민결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뺏으려 한다. 이때 부모인 당신은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① 민서야 안 돼, 하지 마.
② 옆 집 길우는 동생을 잘 돌보던데 너는 왜 이러니.
③ 너 계속 그러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
④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민결이가 싫어하잖니.
⑤ 민서가 형이니까 양보하는 게 좋겠다.

보기 5개 중 오답 2, 3개는 쉽게 걸러낼 수 있다. 정답을 ④번이나 ⑤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서울 양천구에서 5, 6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 30명에게 이 문제를 풀게 한 결과도 예상대로였다. ①번, ②번을 선택한 사람은 없었다. ③번은 2명, ④번은 20명, ⑤번은 8명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생각’이 아닌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다시 물었다. 결과는 크게 달랐다. ①번 10명, ②번 2명, ③번 4명, ④번 6명, ⑤번 6명이었다. 나머지 2명은 ‘보기에 없는 방식’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아동심리학자, 소아청소년과와 정신과 전문의들이 말하는 정답은 ‘정답이 보기에 없다’이다. 5개 보기 모두 자녀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대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정답은 민서에게 왜 그랬는지를 먼저 물어보고 민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뒤 ‘∼하자’는 식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응답자의 93%(28명)가 무심코 ‘잘못된 말’을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녀의 정신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 같은 평범한 말도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는 얘기다.

○ 평범하게 보이지만 문제 있는 말들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박미란 씨(37)는 평소에 “그러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박 씨는 “아이가 잘못한 행동을 즉시 멈춰서 그런 말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녀에게 경고와 위협을 가하는 이런 말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신혜원 서경대 아동학과 교수는 “아이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잠재의식에서 부모에 대해 실망이나 분노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무심코 반복되는 또 다른 유형의 말인 “안돼, 하지 마”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아이를 강압적으로 혼낼 때 사용된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런 대화가 계속되면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로 큰다”고 설명했다. 아예 말문을 닫을 가능성도 높다. ④번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동생이 싫어하잖니’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짚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아이의 생각을 배제하고 부모의 생각만 말하게 되면 아이에게 열등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할 가능성이 높다.

⑤번처럼 첫째 아이에게 무조건 양보를 강요하는 부모의 말 또한 첫째 아이 역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 경우 첫째 아이의 행동에서는 자칫 동생처럼 어려 보이려고 하는 퇴행 현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 ②번 역시 아이들이 싫어하는 ‘비교 방식’ 이어서 정신 건강에 해롭다.

○ 4∼7세 정신건강 훼손, 10년 뒤 ‘부메랑’

전문가들은 4∼7세 무렵 부모가 던진 말이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해치면, 10년쯤 지나 그 결과가 부메랑처럼 나타난다고 경고한다. 사춘기와 겹치는 시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부모와 자식 모두가 힘들어진다.

중학교 2학년 A 양은 어렸을 때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로부터 “울지 마, 뚝. 셋 셀 때까지 그쳐!”, “우리 집 울보래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춘기가 되자 남자 친구들에게 지나치게 빠져들어 성폭행까지 당했다. A 양은 최근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상담 결과 어린 시절 부모에게 들었던 말들이 A 양의 정신건강을 해친 것으로 드러났다. 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상담원들은 “A 양은 무의식중에 부모로부터 인정과 애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그로 인해 남자 친구에게 지나치게 몰입한 바람에 사고에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고 풀이했다.

부모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인터넷 중독에 빠진 초중고 학생들도 발견된다. 하루에 최소 6시간 이상 인터넷 게임을 하던 고등학교 1학년 B 군은 최근 한국심리건강센터를 찾았다. 상담원들이 조사한 결과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 힘들다. 너 때문에 못산다”는 부모의 말이 B 군의 게임 중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소수연 박사는 “아이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와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부모의 말 때문에 그림도 그려 보지 못하고 훼손될 수 있다”며 “부모는 자신의 말이 자녀의 평생 정신건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모진수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자녀 정신건강#무심코 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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