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양귀자 “너만의 풍경 문장으로 옮겼으니, 작가가 될 수 있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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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말 한마디]김탁환(소설가)

김탁환(소설가)
김탁환(소설가)
좋아하는 소설을 두 번 읽고, 그 소설에 대한 비평을 쓰다가, 내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가 스물여덟 살 즈음이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며 조선시대 고소설부터 근대와 현대 소설을 두루 읽었던 터라, 눈은 높았지만 손은 무뎠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뒤늦게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경남 진해로 내려갔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작문과 해양문학을 강의하는 것이 내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였다. 오전 7시 45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 앉아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단편 소설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서울에 계신 양귀자 선생님께 팩스로 보냈다. 지금이라면 장편소설 원고를 파일에 담아 e메일로 간단히 띄웠겠지만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소설이 담긴 긴 팩스 용지가 혹시 엉키지나 않을까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처음에 선생님은 내 습작품에 대해 구체적인 말씀이 없으셨다. “또 써 봐.” 이게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전부였다. 처음부터 빛나는 시를 쓰는 시인은 있지만, 처음부터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없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인물도 구성도 문체도 손볼 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품평 대신 침묵을 택하셨으리라.

그러나 나는 서울과는 너무 먼 남해안 작은 도시에 있었고, 반복되는 아침에 군인 정신으로 소설을 쓰는 것 외엔 마음 둘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부끄러움보다 열정이 컸던 시절이었다. 반년쯤이 흘러갔다. 그사이 단편을 여섯 편쯤 썼고, 선생님께 팩스로 보냈으며, 다음 작품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단편 하나를 더 썼다. 막내 외삼촌에 관한 이야기였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경남 창원의 어느 야산에서 과수원을 했다. 그 과수원에는 앵두나무가 100여 그루 있었다. 6월이면 친척들이 과수원으로 몰려가서 주렁주렁 붉게 익은 앵두를 땄다. 아이들은 양손을 번갈아 뻗어 앵두를 한 움큼씩 쥐고 먹느라 바빴다.

서울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만의 풍경을 문장으로 옮겼으니, 작가가 될 수 있겠다. 짜증을 내며 산길을 올라가던 아이가 산마루에서 붉게 물든 앵두나무를 발견하고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달려가는 이 장면을 김탁환 아닌 누가 또 쓰겠니?”

해군사관학교 연구실에서 썼던 단편들은 단 하나도 발표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인상적이라고 지적해주신 장면이 담긴 소설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전문 작가로 나서기엔 모자라는 솜씨인데도 작가가 될 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읽어온 소설들로부터 영향 받은 풍경이 아닌 나 자신만의 풍경을 거기서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제대한 후 소설가가 되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연구실과 아침 습작과 팩스와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내 재능을 의심하다가 소설을 읽고 논하는 연구자의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각종 작법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소설을 업으로 삼기에, 나 역시 글쓰기에 관한 책을 두 권 펴냈다. 나는 줄곧 글을 쓰는 테크닉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독자들로부터 ‘태도’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수많은 풍경 중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옮기고자 분투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물론 양귀자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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