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해]박승희의 운명, 문재인의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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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 논설위원
최영해 논설위원
소치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500m 결승전에서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친 박승희는 시상식 후 자신의 트위터에 “모든 게 운명일 것이고 난 괜찮다. 대한민국 파이팅!”이라고 썼다. 두 번이나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달린 것은 선수의 본능이라 해도 경기에서 지고 난 뒤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스물두 살짜리 선수가 올린 글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분통이 터져 경기장에 드러누워 펑펑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박승희는 담담했다.

박승희는 “넘어진 것도 실력”이라고 했다. 다른 선수의 반칙으로 경기를 망쳤는데도 자신을 밀친 영국 선수 엘리스 크리스티에 대해선 “크리스티가 나보다 더 울고 있더라. 착한 선수인데 나중에 내게 미안해할 것”이라고 했다. 은메달 딴 선수가 금메달 놓쳤다고 서운해하는 장면에 익숙한 나로선 박승희의 이런 모습이 신선했다. 금보다 값진 구릿빛 메달이었다.

박승희의 ‘운명론’을 접하면서 문득 문재인이 떠올랐다. 기자가 처음 문재인을 만난 것은 2002년 부산시장 선거 때였다. 신기남 의원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한이헌 씨를 밀던 문재인을 옆에서 보니 정치와는 도통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부산지역 지식인과의 오찬 자리에서 문재인을 소개하면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할 때 현장을 취재했던 나는 적잖이 놀랐다. 노무현은 항상 문재인을 자기보다 앞세웠다. ‘영혼이 맑은’ 문재인이 옆에 있었기에 노무현이 빛을 발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첫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에 내정된 후 서울에서였다. 노 대통령은 처음엔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쓰려다가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수 있는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을 맡겼다. 문재인은 부산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통했다. 권모술수(權謀術數)가 판을 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재인은 정무 감각이 부족해 민정수석도 비서실장도 낙제점에 가까웠다. 정권 초 측근 비리에 추상(秋霜)같아야 할 민정수석 자리에서 어정쩡한 태도로 화를 키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권력의 잔인한 속성을 모르는 그는 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도 원칙만 강조하면서 대통령 퇴임 후를 대비하는 ‘센스’가 부족했다.

정권이 교체된 뒤 권력의 칼날이 노 전 대통령을 겨눴을 때 문재인을 비난하는 측근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심지어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을 때 검찰 동태를 파악할 ‘라인’도 확보하지 못해 여러 사람이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친노 그룹 내에서조차 ‘바보 문재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적잖았다. 한마디로 정치라고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임종 소식을 너무나 차분하게 전한 문재인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지만 속사정은 이랬다.

그가 2011년 펴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썼다. 2002년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노사모라는 풀뿌리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된 ‘죽은 노무현’이 ‘산 문재인’을 정치로 이끈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어도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던 문재인이 대선 패배 후 “모든 것이 운명일 것이고 난 괜찮다. 대한민국 파이팅!”이라고 했다면 야당이 지난 한 해 동안 불복(不服)의 정치에 매달렸을까 싶다. 문재인은 선거가 끝난 지 1년도 안 돼 차기 대권에 도전할 뜻을 내비쳐 여전히 그의 정치적 판단을 의심케 한다. 그가 대선 불복 세력의 소매를 붙잡고 말렸더라면 통 큰 정치인으로 후사(後事)를 도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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