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8>사우나탕에서, 쌀이시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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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탕에서, 쌀이시여
―차창룡(1966∼ )

화탕지옥에서 사우나로 땀 빼고 나오자 땀 쭉 빼고 나오자
쌀이시여 살아생전 사사건건 도와주신 쌀이시여 땀 쭉 빼고
나와서 내게 사사건건 밥이 되어주신 슬픔이시여 그렇지요 왜 그리
슬픔이었는지요 쌀이시여 당신이 흩어질까 두려웠지요 어머니는 밥이 된 당신
푹 익은 보리쌀 위에 얹어 뜸을 들이면 당신은 겸손하여 보리밥 속으로 묻히려 하지만
어머니의 닳아빠진 정교한 나무 주걱 살며시 떠올리면 새하얀 왜 그리 슬픔이지요 할머니의 밥이
가족 모두의 밥이 될 수 없었음 아니에요 할머니의 밥이
할머니의 밥이 될 수 없었으므로 내 밥이었으므로 어머니가
나무라셨지요 할머니는 손자들의 밥이었으므로 할머니 자다가 돌아가심
쌀이시여 죽음도 밥이지요 당신에겐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밥이지요
화탕지옥에서 아 우리 집 화탕지옥에서 젊어 떠나버린 할아버지
땀 있는 대로 빼고 떠나신 할머니 무쇠솥에 절하옵니다 쌀이시여
밥통에게 절하옵니다 사우나탕 절 받으시옵소서 땀이시여 떠나가는
혼들의 도포자락 밥이옵니다 땀 쭉 빼고 나오자 그 신사는 뚱뚱한 잠이 들었다


‘빵만 있으면 어지간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 우리 동네 이웃 골짜기에 있는 빵집 ‘베이커스 테이블’ 벽에 붙은 글귀다.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의 명언이라는데, 빵집 주인의 센스가 감탄스럽다. 빵이여, 밥이여, 빵이나 밥을 목구멍으로 넘겨야 숨을 잇는 목숨이여. 빵의 슬픔이여, 밥의 슬픔이여!

사노라면 기쁜 순간, 행복한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기억 속에 쌓여 있던 평생의 슬픈 일, 비참했던 일만 캄캄하게 쏟아져 내리는 때가 있다. 당최 앞이 안 보이는 현재 상황을 더이상 짊어지고 있기 힘들 때, 과거도 오직 고(苦)일 뿐이었다는 듯 그렇게. 한세상 산다는 게 화탕지옥이라고 느끼며 화자는 역시 화탕지옥 같던 그 옛날을 떠올린다. 화탕지옥의 화탕(火湯)이 쌀 조금 섞인 보리밥이 푹푹 삶아지던 무쇠솥으로 이어지며 화자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삶의 비참에 푹푹 삶아지던 할머니와 어머니, 나는 그들을 밥으로 먹고 살았던 것이구나. 낟알이 푹푹 삶아진 밥이여, ‘땀 있는 대로 빼고 떠나신 할머니’시여, 절하옵니다! 인생이 화탕지옥인가? 그렇다면 사우나라 생각하고 땀 쭉 빼고 나오자!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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