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당신의 살, 편안하십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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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며칠이 지났는데도 설 연휴 중 생긴 부기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 끼에 하루 권장열량의 75%나 된다는 설 밥상을 거푸 받은 탓이다. “부은 게 아니라 살이 찐 것”이라는 아내의 입바른 소리가 고깝게 들리고 약이 오른다. 먹어도 살 안 찌는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한국의 900만 ‘과(過)체중인’들에게 살찌는 것과 붓는 것은 절대 같은 일이 아니다.

한 달 전 사두고 놔뒀던 책에 절로 눈길이 갔다. ‘왜 뚱뚱한 사람이 더 오래 사는가’란 선정적 부제가 붙은 ‘다이어트의 배신’. 독일의 뇌 과학자이자 비만 전문가인 아힘 페터스는 이 책에서 살이 찌는 건 병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대한 인체의 정당한 ‘응전’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밥맛이 없고 몸이 축나 마르는 체질보다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살찌는 체질 쪽이 더 건강할 개연성이 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해 12월 말 동아일보의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 열렸던 편집국 회의 때가 떠올랐다.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이들은 최종적으로 선정된 LA 다저스의 투수 류현진을 비롯해 가수 싸이, 골프 여제(女帝) 박인비 등. 하나같이 당당한 체격과 한국적인 대두단지(大頭短肢) 체형을 갖춘 인물들이다. 이 중 류현진, 박인비 선수는 승패가 갈리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놀라운 침착성을 발휘한 스포츠맨이다. 싸이는 군대에 두 번째 가서도 밝은 모습으로 국군장병을 위해 열정적인 공연을 펼친 끝에 재기해 국제스타가 됐다. 살집 있는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가 스트레스에 강하다는 설명이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스트레스에 수동적으로 노출된 일반인들과 차이가 크다. 페터스는 책에서 보통 사람들이 받는 사회, 경제적 스트레스와 비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정기적 수입이 없고, 자녀와 함께 사는 미국 5대 도시의 빈민 거주지역 여성 4500여 명 중 일부를 추첨을 통해 생활여건이 나은 곳으로 이동시킨 실험이었다. 15년 후 중산층 지역으로 이주한 여성들의 비만도는 가난한 동네에 남은 여성들보다 하락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쳤을 때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갑자기 생활이 팍팍해진 사람들은 쇼핑, 여행 등 돈이 들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외부 활동을 크게 줄였다. 반면 집에 들어앉아 TV 앞에서 라면, 과자류, 소주 등 칼로리는 높고 영양소는 적은 이른바 ‘공(空)칼로리’ 음식들을 많이 소비했다. 이때 ‘IMF형 비만’이란 말이 나왔다.

최근에도 비만 관련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5∼94세 한국 남성의 3분의 1, 여성의 4분의 1 정도는 복부 비만이라는 조사 결과, 10여 년간 소득수준 하위 계층 어린이 및 청소년의 비만율이 높아진 반면 같은 또래 상류층 아이들은 비만율이 떨어져 ‘비만의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기사 등이다. 비만이 스트레스 수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 수준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새해 들어서는 온 국민에게 스트레스를 던지는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1700만 명이 신용카드 개인정보가 유출돼 금융범죄 등 2차 피해 우려에 떨고 있다. 여수 기름 유출이란 대형 재난도 터졌다. 두 사건의 관리 책임이 있는 장관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계속되는 말실수와 황당한 대응으로 국민들의 화만 돋우고 있다. 대외적으론 신흥국발(發) 금융위기가 다시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대로 가다간 올해도 한국인들의 다이어트가 연초 계획대로 성공하긴 어려울 것 같다. 사회, 경제적 스트레스로 늘어날 ‘살’의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설 연휴#다이어트#비만#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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