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96>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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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1962∼)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절절히 간절하고 아름다운 시구들이 싱싱한 수액(樹液)으로 타고 흐른다.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장정일은 길이 빛나는 시인으로 남을 것이다. 스물두 살 장정일이 ‘강정간다’ ‘석유를 사러’와 함께 이 시를 들고 혜성처럼 나타났을 때 독자들은 열광했다. 모든 분야에서 신인에게 구하는 ‘신선한 피’를 독보적으로 보여주는 시들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고 힘찬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흡연의 사슬’ ‘지친 새들의 날개’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등 지치도록 방황하는 계절을 보내거나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에 매인 청춘들, 그렇게 나이 들면서 배고픔과 실직을 맛보게 된 이들이 그 아래서 ‘휴식한 만큼 일생이 아물어질’ 사철나무 그늘이 있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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