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시대를 착각하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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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며칠 전 미국 워싱턴을 다녀왔다. 그런데 미 수도의 관문인 덜레스 국제공항의 입국 심사 부스는 단 2곳만 열려 있었다. 미국시민권자용 1곳, 방문객용 1곳이 전부였다. 부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예산 때문에 입국심사 직원 수를 줄였다는 불평이 들렸다.

귀국길 인천공항의 모습은 180도 달랐다. 여러 부스에서 입국심사가 진행됐다. 한국국적자는 입국 수속에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친절도, 공항시설, 서비스 등에서 워싱턴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20여 년 전 선진국 공항을 이용할 때 우리 공항과의 퀄리티 차이에 한숨을 쉬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공항뿐만 아니다. 워싱턴 인근 대형 가전제품 매장에서 한국 제품들은 최고급, 최고가로 대우받고 있었다. 한국이 여러 부문에서 선진국을 앞설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로 들어오는 공항버스에서 TV 뉴스를 보니 시계가 1980년대에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뉴스 속 일부 종교인과 단체는 군부정권에나 퍼부어 마땅할 비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독재정권과 억눌린 민중·민주화 세력이 대립하는, 언론 자유가 막히고, 선거 등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확보 안 된 80년대처럼 간주하는 이들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 언행을 놓고 여야, 보수 진보진영이 찬반으로 들끓는 것도 옛 화면 그대로다. 실정을 모르는 외국 언론이 ‘한국 정부와 가톨릭이 험악한 관계’라고 보도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정말로 복고의 완결판, ‘응답하라 1980년대’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시대착각형’ 인사들의 머릿속만 변하지 않았을 뿐이다. 과거 성직자 지식인들은 일반인은 감내하기 힘들 불이익을 무릅쓰고 직업적 양심과 소명감으로 행동했으며 그 내용은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불꽃을 지펴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즘 일부 인사의 발언은 장삼이사라도 술집이나 거리에서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용기가 필요하거나 통찰력이 담긴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성직자 교수 원로 등의 지위를 ‘확성기’ 삼아 자신의 이념·주관적 의견을 확산시키려 할 뿐이다.

워싱턴의 지한파 인사는 한국의 이념갈등을 우려하면서 ‘Put yourself in his shoes’라는 표현을 상기시켰다. 직역하면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보라’, 즉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비슷한 표현이다. 사회부 에디터로 이념, 지역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대할 때 필자는 ‘시대 바꿔보기’를 해보곤 한다. ‘이 사건이 다른 정권에서 발생했으면 나는 어떻게 대했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 독재정권 퇴진 운운하는 이들에게도 ‘상상 속 시대 이동’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지금이 노무현 정부 출범 초인 2003년이라고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전임 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북한의 사이버 선동전에 맞선다며 올린 글 가운데 김대중 정권의 치적을 홍보하고 이회창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자 패배한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3·15보다 더한 부정선거라며 대선 무효와 노무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과연 진보진영은 이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초기 극우성향 성직자와 교수들이 좌익정권, 종북정권이라고 매도하는 시국미사를 한다면 국민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상상 속 시대 이동’은 현 청와대와 여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2003년 한나라당은 “몇몇 직원의 개인적 댓글”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말았을까. 박근혜 의원은 “나는 국정원에 빚진 게 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공감하며 대통령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어줬을까.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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