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3.0’ 톡 쏘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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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
멘붕(만날 붕붕 뜹시다)…

직장인 김광진 씨(34)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연말 각종 모임에서 사용할 ‘건배사’다. 김 씨는 “요즘에는 참가자들이 한 사람씩 건배사를 하는 자리가 많다”며 “직장, 대학 등 5, 6개의 모임에 나가서 사용할 건배사를 대충 준비했다가는 분위기를 망칠까봐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건배사가 보통 사람들의 스트레스 거리가 된 배경에는 직장 문화의 변화가 있다.

올 8월 ‘건배사 모음 대백과’라는 책을 낸 김선영 한국전력 충북본부 서청주지사 과장은 “상명하복 분위기가 강하고 술자리를 일의 연장으로 여기는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는 건배사가 일종의 엄숙한 ‘의식’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리더의 건배사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수직적인 기업 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건배사도 바뀌기 시작했다. 몇년 전부터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한 사람씩 일어나 돌아가며 건배사를 한 뒤 술을 마시는 사례가 많아졌다. 한 사람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다른 사람은 청중이 됐던 술자리가 모두가 참여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보통 직원’들이 늘면서 이런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해결책이 등장하고 있다. 현재 연말 서점가에서는 건배사 모음집이 인기를 얻고 있는가 하면 건배사 스피치 강의가 생겼고, 최근에는 다양한 건배사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치어 업 건배사’)까지 등장했다. 프로그램 개발자 이호석 씨는 “회사 상사들이 술자리에서 독특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을 보고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며 “이제는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건배사를 외치는 것이 일종의 ‘능력’이자 자신을 부각시키는 PR수단으로 평가 받는 시대”라고 말했다.

건배사는 단순한 술자리 구호가 아니다. 건배사에도 ‘대세’가 있고 시대상이 담겨 있다. 1960, 1970년대 경제 개발 시절에는 공생(共生), 협동(協同)을 강조하는 건배사들이 많았다. ‘위하여’나 ‘우리는! (하나!)’, ‘함께! (가자!)’ 등 모임의 대표가 건배사를 제의하면 참석자들이 함께 외치는 형태였다. 다소 딱딱했던 건배사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 X세대 문화가 탄생한 이후부터다. ‘빠삐용(빠지거나 삐치거나 따지면 용서하지 않는다)’, ‘오징어(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 등 삼행시를 이용한 언어유희 형태로 차별화 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최근에는 불황을 극복하자는 뜻으로 ‘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이나 ‘멘붕(만날 붕붕 뜹시다)’, ‘행쇼(행복하십쇼)’ 등의 개성을 강조하는 형태의 건배사가 등장했다. “가장 맛있는 라면은? A라면, B라면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식의 ‘Q&A’ 형태의 건배사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 술 문화를 다룬 ‘취하는 책’을 낸 이장원 하이트진로 교육문화팀 부장은 “20대는 취업이나 솔로 탈출, 30, 40대 직장인들은 승진이나 부자 되기, 50대 이상 중장년은 건강 등 세대별로 건배사 주제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술자리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호응을 많이 끌어내는 건배사는 무엇일까. 건배사 모음집 ‘대통령 건배사’를 낸 저자 이황근 씨는 “건배사는 30초의 특별한 승부이며 예술”이라며 “최고의 건배사는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유머를 넣어 모임을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나가는 고품격 코멘트”라고 말했다.

황수현 soohyun87@donga.com·김범석 기자
#건배사#연말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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