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62>마흔 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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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송재학(1955∼)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송재학 시에서는 뭐 하나라도 배우는 게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미나리아재비가 삶아 먹어도 되는 식물이라는 것, 햇빛 잘 드는 습지에 무리 지어 자란다는 것, 번식력 왕성한 여러해살이 풀이라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그런 미나리아재비를 불러내 마흔 살 고비를 넘어가는 사람, 남자의 감상을 담았다. 의미를 산문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이어가는 이 솜씨! 은근하고 깊은 맛이 있다.

마흔 살, 젊음의 경계를 막 넘긴 나이. 이 대외적 나이로 우리는 실제 제 상태와 상관없이 한 생명체로서 강등당한 기분으로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된다. 어제오늘 가난했던 게 아닌데 제 가난이 더 부끄러워지고. 어째 세상이 자기를 편히, 달리 말하면 만만히 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담담히, 혹은 당당히 대면하기 퍽 힘든 마흔 살을, 시인은 미나리아재비에 비유한다. 이름부터가 남의 이름에 아재비로 더부살이인 잡풀 같은 마흔 살. 열정도 매력도 없어져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별 볼 일 없는 나이. 앞으로는 계속 이런 삶이겠지. 그래도 마흔 살, 아직은 좋을 때. 쉰 살이 넘으면, ‘젊은이를 만나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를 명심해야 한답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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