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로 넓혀라” “표지판 여기에” 주민에 의한 교통행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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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 꺼! 반칙운전/6부]<3>일본, 시민단체-정부-지자체 ‘합심’

칼같은 도쿄 정지선 준수 한국의 명동 격인 일본 도쿄 신주쿠 사거리에서도 일본 운전자는 횡단보도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다. 4월 12일 오후 6시 신주쿠 사거리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는 동안 택시 두 대가 정지선 안에 서 있다. 도쿄=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칼같은 도쿄 정지선 준수 한국의 명동 격인 일본 도쿄 신주쿠 사거리에서도 일본 운전자는 횡단보도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다. 4월 12일 오후 6시 신주쿠 사거리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는 동안 택시 두 대가 정지선 안에 서 있다. 도쿄=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추월차로인 1차로는 모두 비어 있었다. 운전자들은 지정차로제를 확실하게 지켰다. 교통체증이 극심한 퇴근시간 수도 도쿄 시내 한가운데서도 경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교통안전 선진국’이다. 일본 교통사고종합분석센터(ITARDA)의 발표에 따르면 2011년 일본의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는 4.3명이었다. 한국(10.5명)의 절반 수준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일본의 교통안전 선진국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장택영 수석연구원과 함께 4월 10∼13일 일본의 교통안전 관련 시민단체와 정부, 지방자치단체를 방문했다. 도로 환경이나 시설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운전자의 태도와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은 크게 달랐다.

○ 시민단체, 새로운 안전대책 정부에 적극 제안

일본 도쿄에 사는 이다 메구미 씨(39·여)는 1997년 언니 이다 미즈호 씨를 잃었다. 만취한 시 공무원이 운전을 하다 미즈호 씨를 들이받았다. 미즈호 씨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큰딸의 죽음 뒤 슬픔에 잠겨 있던 미즈호 씨의 어머니 이다 가즈요 씨는 음주운전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가즈요 씨는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를 거친 끝에 음주운전을 줄이기 위해 결성된 시민단체인 미국 ‘MADD(Mothers Against Drunk Driving·음주운전에 반대하는 엄마들의 모임)’의 일본 법인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가즈요 씨가 2002년 일본에 만든 ‘MADD Japan’은 일본에서 가장 큰 교통안전 관련 시민단체다. 현재 가즈요 씨의 둘째 딸 메구미 씨가 2003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 MADD Japan을 이끌고 있다. 취재팀은 4월 11일 도쿄 메구미 씨의 자택 겸 사무실을 찾았다.

메구미 씨는 “MADD Japan은 안전한 도로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나 정책을 정부에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있다”며 “정부와 국회 또한 이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여 정책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한 예로 현재 일본정부는 ‘인터로크(Inter-lock)’라는 장치를 새로 나오는 모든 차량에 의무적으로 장착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인터로크는 미국에서 발명된 음주운전 방지 장치로서 차량 실내 공기를 측정해 알코올이 섞여 있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는 전자장치다. 메구미 씨는 “일본 정부와 국회에서 모의실험을 거쳐 성능이 입증됐다”며 “현재 의무 장착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MADD Japan은 전국 회원 2000명과 기업 및 법인이 내는 연회비로 운영된다. 한국도 MADD 라이선스를 들여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단체가 결성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교통안전 시민단체인 ‘녹색어머니회’는 자발적인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지만 정책 입안 역할까지는 닿지 못하고 있다.

○ 정부, 지자체와 머리 맞대고 안전대책 세워


일본은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한 나라다. 중앙정부가 교통안전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리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지역 특색에 맞게 지방에서 세운다.

4월 11일 오전 10시 일본 도쿄 내각부에서 만난 국토교통성 야마자키 보조 정책통괄참사관은 “일본은 1960년대만 해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한 해에 1만7000명에 달할 정도로 교통사고가 심각했다”며 “총리가 1966년 ‘교통사고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부터 변화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1970년에 만든 ‘교통안전대책 기본법’에 따라 5년마다 정부가 국가 교통안전 기본계획을 세우고 매년 세부 대책을 논의한다.

야마자키 참사관은 “1970년 1만6765명이던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2007년 5000명 이하로 줄었다”며 “구체적인 실행 법규는 도도부현(일본 광역자치단체) 단위서 지역 실정에 맞게 자체적으로 세운다”고 밝혔다. 단, 사망자 감축 수치 등의 정책목표는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하달한다.

취재팀이 방문한 때는 마침 4월 6일부터 15일까지 일본에서 ‘전국 교통안전 운동’ 캠페인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야마자키 참사관은 “1년에 봄과 가을 한 차례씩 캠페인을 진행하는데 중앙정부에서 교통안전 관련 공무원을 지방에 파견한다”며 “정부에서 하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자체가 효과적으로 대책을 집행하고 있는지 등을 꼼꼼하게 점검한다”고 밝혔다.

○ 지자체는 시민 의견 수렴해 대책 집행

4월 12일 방문한 요코하마 시는 지자체 공무원과 주민이 손잡고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든 사례로 유명한 도시다. 요코하마 시 이시와타 지로 도로국 총무부 교통안전과장은 “중앙정부의 지시로 1972년부터 스쿨존 안전 대책 등에 관해 지역 주민의 의견을 계속 수렴해 왔다”고 밝혔다.

요코하마 시에는 ‘사친회(PTA·Parent-Teacher Association)’가 조직돼 있다. 학교 교사와 학부모가 모여 지역 경찰 관계자 및 시 공무원과 함께 교통안전 대책을 논의한다. 매년 4, 5월경 시에서 공문을 보내면 학교 강당 등에서 회의가 열린다. 학부모들은 경찰이나 시 공무원의 관심이 닿지 않았던 집 주변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나 위험지역 등을 지적한다. 시는 이를 기록하고 구체적인 안전대책을 세워 집행한 뒤 다음 회의 때 결과를 발표한다. 요코하마 시 곳곳에는 이런 식으로 설치된 안전시설이나 넓혀진 도로가 많다.

장택영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일방적으로 정부에서 대책을 만들어 주문한다”며 “지역 실정을 잘 아는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요코하마 모델이 교통안전 대책 마련에는 더 적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요코하마=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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