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열정’이라는 헛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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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4860원.’ 2013년 올해의 시간당 법정 최저임금이다.

그런데 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인 343원을 시급으로 지급한 회사가 있었다. 바로 국내 일러스트의 대표업체라고 불리던 ‘팝픽’이다. 이 회사는 ‘배우면서 일할 수 있고 외주로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제안으로 관련 업계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취업준비생들을 끌어들였다.

많은 이들이 동참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실무 교육을 명목으로 과도한 외주 작업을 해야 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을 반으로 깎기도 했다. 일러스트 업계의 저변 확대와 작가의 권익 향상을 명분으로 내세우던 이 업체는 노동착취 혐의로 고소당하고 폐업한 상태다. ‘슈퍼 갑질’도 모자라 열정을 착취한 이 회사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갑질’은 잘못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이 방치되면서 굳어진 관행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예술 쪽에서 일한 후에 돈을 받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이다. 문서로 된 형태의 계약서를 쓰고 일하는 경우가 드문 관행도 한몫한다. 언제나 사람은 많고 기회는 적다.

일례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학예사 자격증을 살펴보자. 원서라도 내보려면 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경력인정 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 최소 1년 이상(1000시간) 필요하다. 현장 경험이 필요한 전공자는 계속 배출되고, 일할 수 있는 기관은 한정되어 있으니 최저임금은커녕 점심 값과 교통비만 제공해도 괜찮은 축에 든다. “무보수로 경력 쌓는 게 어디냐, 돈 줘도 못 배울 경험을 쌓게 해주고 있는데 열심히 하라”고 큰소리치는 업체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구조인 셈이다.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H 씨는 얼마 전 오전 2시가 넘은 시각에 “대표님, 고마워요”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날 밤 클럽에서 공연한 밴드가 공연비로 건넨 봉투를 열어보고 감격한 나머지 보낸 문자였다. 이렇게 많이 주실 줄 몰랐다고, 지금까지 받았던 금액 중에 가장 큰 액수라고 말이다. 4인으로 구성된 그 밴드가 받은 금액은 20만 원, 1인당 5만 원이었다. 공연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일을 하고 돈을 받는 당연한 상황에도 감격하는 것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졸업하는 대다수 연주자를 기다리는 무대는 공연장이 아니라 주말 결혼식장이다.

게다가 요즘은 ‘재능 기부’라는 신종 기술까지 등장했다.

재능 기부는 비용을 지급하지 않거나 적게 지급할 때 꽤 유용한 신종 아이템이다. 청춘에게는 패기와 열정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쌓으라고 닦달하고, 그렇게 쌓은 경험으로 만들어낸 콘텐츠는 재능 기부로 사회에 환원할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비용 이야기를 꺼내면 예술가가 돈만 밝힌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이런 기회를 주는 게 어디냐, 그리고 이 행사는 좋은 취지로 하는 거니까 선의로 도와달라고 한다. “페이(pay)는 드리기 힘들지만 대신 비싸고 맛있는 밥을 드리겠다(이런 분들이 그렇게나 많단다!)”면서.

“작가가 돈이 없다고 순수한 게 아니다. 돈이 없으면 순수에 더 큰 위협을 받는다. 돈이 없기 때문에 타협해야 하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작가가 돈을 벌면 순수하지 않다고 한다. 우린 뭐 물감 짜먹고 사나.” 화가 이다(2daplay) 씨가 트위터에 올린 한탄이다.

콘텐츠를 판매, 유통하는 업체는 돈을 벌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그 콘텐츠로 돈을 벌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분야를 막론하고 자주 벌어진다. 허영만 작가가 식객2를 독점 연재할 정도로 창작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지난 4월 야심차게 출발한 카카오스토리는 콘텐츠 유입도 구매도 거의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지지부진하다. 포털에 연재되는 웹툰을 공짜로 볼 수 있고, 유료화되면 작가가 미안해하는 기막힌 현실에서 모바일 콘텐츠를 구매하길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창작자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건 공공 영역도 마찬가지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예술 강사의 임금기준인 ‘시간당 4만 원’은 8년 동안 단 한번도 인상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예술인의 안정적인 생활과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정책 목표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술가들을 선발해 6개월간 60만 원씩을 지원하는 제도와 예술 강사의 시간당 강사비를 인상하는 정책 중에 어느 쪽이 더 예산의 효과가 크고 안정적이며 만족도가 높을까?

열정으로 힘든 현실을 참고 견디고, 재능 기부와 기부 유치 실적을 내라고 닦달하는 대신 최소한 공공 예산에서만큼이라도 사람을 쓰는 대가를 인정하고 제대로 지급하는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또한 이 지원은 ‘시간제 일자리’를 ‘시간 선택제 일자리’로 바꾸는 성격의 지원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명칭을 바꾸는 것이 해답의 전부일 수 없으며, 모름지기 정부가 해야 할 지원은 정책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개선이니까 말이다.

정지은 사회평론가
#최저임금#열정#노동착취#재능 기부#창작자#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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