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무예 이야기]단신은 방패, 장신은 활-창 다뤄… 최우수병은 기수-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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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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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병(選兵) 방식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 전 과정을 묘사한 ‘반차도(班次圖)’ 가운데 혜경궁 홍씨를 시위하는 군사들의 모습. 이 장면의 상단 부분에서 장창수, 조총수, 기창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기준에 따라 장창수로는 키가 크고 허릿심이 좋은 군사를, 조총수로는 담이 커서 총소리에 놀라지 않는 차분한 병사를, 기창수로는 신호체계로 활용되기에 가장 발 빠르고 튼튼한 군사를 배치했다. 동아일보DB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 전 과정을 묘사한 ‘반차도(班次圖)’ 가운데 혜경궁 홍씨를 시위하는 군사들의 모습. 이 장면의 상단 부분에서 장창수, 조총수, 기창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기준에 따라 장창수로는 키가 크고 허릿심이 좋은 군사를, 조총수로는 담이 커서 총소리에 놀라지 않는 차분한 병사를, 기창수로는 신호체계로 활용되기에 가장 발 빠르고 튼튼한 군사를 배치했다. 동아일보DB
《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외형적으로만 보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키가 크거나 작고, 또 어떤 사람들은 뚱뚱하거나 말랐다. 여기에 그 사람의 화술이나 성격, 능력이 더해진다면 경우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진다.인사(人事)란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일사불란한 조직이 생명인 군대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조선시대에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 강군을 만들기 위한 인재 선택, 즉 선병(選兵)의 기준이 있었다. 》


조선시대에는 누가 군대에 갔나?

조선시대에는 향교나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과 현직 관리를 제외한 16세부터 60세 이하의 남성 모두가 국방의 의무를 졌다. 이른바 군역(軍役)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향교에 거짓으로 등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향과 호패를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 화전을 일구며 사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일반 백성 대부분은 성실히 군역을 이행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하지만 모든 건장한 남성이 군대에 간다면 일상적 사회 기능이 멈추게 될 게 분명했다. 누군가는 밭을 갈고 모를 심어 식량을 생산해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생필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 그래서 세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만이 실제 군대에 입대를 하고 나머지 두 명은 ‘포(布)’라는 세금을 내 군대에 간 사람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군역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군대에 간 사람들은 요즘처럼 신병교육훈련 및 기초체력 검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특징에 따라 병과가 달라졌는데, 그 구분법을 보면 당시 군대에서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지, 혹은 꺼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군사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시골에서 성장하여 뼈가 견실하고 얼굴이 검으며 키가 큰 사람이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손과 얼굴이 거칠고 피부와 살이 단단해서 웬만한 군사훈련은 간단히 버텨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싸움판에서 성장해 온 이른바 ‘왈짜패’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전장에서 충분히 공을 세울 수 있을 만한 공격적인 심성을 갖고 있어 군대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반면 군대에서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였다.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병서에 크게 적어놓은 것을 인용하면 이렇다. 첫째는 ‘평시에 빈둥빈둥 노는 자로 얼굴이 훤하게 빛나고 행동을 약삭빠르게 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간교한 자로 정신과 얼굴빛이 안정되지 못하고 상관을 보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훈련장에서 제대로 사람을 가려내 교육하지 못하면 적이 나타나는 순간, 얼굴은 누렇게 되고 입은 바싹 마르며, 손은 조급해지고,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흔들려 그동안 배웠던 모든 것을 일순간에 까먹고 만다고 기록은 전한다. 여기에 성격마저 우직하지 못하다면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적이 코앞에까지 달려와도 도검수가 칼집에서 칼을 뽑지도 못하고 멍하게 서있기도 하고, 조총병의 경우는 마음이 급해서 탄환을 입에 머금고 정신없이 총 쏠 준비를 하다가 총알을 삼켜버리는 황당한 상황까지 연출되곤 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무예도보통지’에는 당시 병사들이 등나무로 만든 원형 방패(등패·藤牌)를 사용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무예도보통지’에는 당시 병사들이 등나무로 만든 원형 방패(등패·藤牌)를 사용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신체조건에 따라 병종을 달리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시대 군대는 사람의 기본적인 신체 특성을 활용해 병과를 구분하기도 했다. 먼저 키가 작은 사람은 방패를, 키가 큰 사람은 활이나 창을 잡게 했다.

방패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적의 공격을 맨 앞에서 막아내는 역할이기에 몸집이 작아야 효과적이다. 특히 빠르게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해서 키 작은 사람이 적격이었다. 병서에는 ‘뱀이 기어가듯, 거북이 숨 쉬듯이 납작 엎드려서 움직인다’고 표현했다.

반면 키가 큰 사람은 활과 장창을 쓰게 했다. 키가 크면 당연히 팔 길이도 길어서 활시위를 많이 당길 수 있고, 똑같은 길이의 창을 들어도 훨씬 멀리 찌를 수 있다. 특히 키가 큰 데다 허릿심까지 좋은 병사가 맨 앞줄에서 휘두르는 장창은 매우 위력적이었다고 한다.

흔히 가장 용감하고 신체조건이 뛰어난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창칼을 들고 싸운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실전에선 이런 우수한 병사들에게 반드시 해당 부대 깃발이나 북, 징 같은 신호용 악기를 담당하게 했다. 기수대나 군악대가 무너지면 오와 열이 붕괴되어 부대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나 로마 군단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었다.

마지막으로 약삭빠르거나 힘이 약한 병사는 화병(火兵), 즉 취사병의 역할을 주어 부대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사람들의 특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군사들을 모집하고 운용한 것을 알게 되면 비과학적일 것만 같았던 조선의 군대가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실제 전투 상황을 가정해 적절한 사람을 뽑고 개인의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지휘관의 최우선 덕목이다.

요즘의 군대에는 조선시대보다 세분화된 병과와 첨단무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군대란 역시 사람의 일로 조선시대 선병법의 기본정신은 아직도 참조할 만하다 할 것이다.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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