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실려 떠다니는 비닐봉지 하나, 우리와 어찌 그리 닮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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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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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닐봉지 하나 바람에 실려 떠다닌다. 스치듯 바닥을 훑고 미끄러지다 훌쩍 날아올라 춤을 추곤 이내 자맥질한다, 아니 다시 떠오른다. 온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을 거는 비닐봉지 하나.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떠다니는 우리 모습과 어찌 그리 닮았나.

‘이달에 만나는 시’ 4월 추천작으로 장옥관 시인(58·사진)의 ‘춤’을 선정했다. 지난달 나온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문학동네)에 수록됐다.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시인이 추천에 참여했다.

시는 길가에서 본 비닐봉지에 착안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에서 끄집어낸 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크리스 쿠퍼)의 아들인 리키(웨스 벤틀리)가 촬영한 것으로 영화 속에서 소개되는 ‘비닐봉지 비행’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시를 썼다고 시인은 말한다.

“비닐봉지가 떠다니는 영상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찡해졌어요. 슬픔이 정화되는 것 같았죠.” 시인은 한걸음 더 그 의미를 확장한다. 팔다리도 없이 몸통만 있는 비닐봉지가 춤을 추는 것은 하나의 환상과도 같다는 것, 우리 머릿속도 그런 부질없는 환상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 ‘사랑’ ‘불안’ ‘헛것’과 같은 시어가 나오는 이유다.

이건청 시인은 “미세한 현실이거나 사물들 속에 깊이 침잠해서 찾아낸 근원적 시적 자아의 모습을 만난다. 사유와 감각이 일체화된 말들이 부드럽게 읽히지만 그 속에 강한 긴장이 내재되어 있다”며 추천했다. “그의 시는 몸의 밀봉을 뚫고 새나오는 말들의 방류 사태다. ‘몸이 말을 벗는 것’ 혹은 ‘비언어적 누설’이다. 결국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이미지나 징후들로 무심코 세상에 쏟아낸다.” 장석주 시인의 추천평이다.

손택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말의 건반을 누른다는 것은 건반 위의 허공을 들어올리는 것과 같다. 시의 음역은 거기에서 탄생한다. 장옥관은 생과 우주에 연결된 키보드를 건반처럼 다룰 줄 아는 시인이다. 말과 말 사이의 터치가 그 자체로 눈부시다.”

이원 시인은 황혜경 시인의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하며 “오랫동안 시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시인이 첫 시집을 냈다. 강약 사이에 만들어진 ‘느낌 씨’의 음계는 두려움을 관통한 활시위를 닮았다”고 평했다. 김요일 시인은 주하림 시인의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을 추천하며 이렇게 평했다. “슬픈 분 냄새를 풍긴다. 거침없는 성적 수사와 싸구려 포르노의 스틸 컷 같은 이미지 사이로 빛나는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의 파편은 눈멀도록 찬란하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장옥관#춤#비닐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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