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2003년 古書 한권이 발견됐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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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이 쓴 ‘정맥고풍변’… 퇴계 비판한 400년 禁書의 사연

7일 경남 진주시 경상대 연구실에서 이상필 교수(한문학)가 ‘정맥고풍변’ 사본을 들어 보이며 글 내용을 설명했다. 아래 펼친 글은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문의 사본. 오른쪽 아래에 별도로 넣은 그림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정인홍의 사당에 있는 그의 초상. 진주=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7일 경남 진주시 경상대 연구실에서 이상필 교수(한문학)가 ‘정맥고풍변’ 사본을 들어 보이며 글 내용을 설명했다. 아래 펼친 글은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문의 사본. 오른쪽 아래에 별도로 넣은 그림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정인홍의 사당에 있는 그의 초상. 진주=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400여 년 전 당대의 유명 문인이 퇴계 이황(1501∼1570)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이다. 현대 사학계도 이 글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다. 퇴계의 명성은 이 글이 쓰였던 1600년 초에도 문묘종사(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위패를 함께 모시는 일)를 논할 정도로 드높았기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사실상 ‘금서(禁書)’와도 같았던 이 정맥고풍변을 2003년 이상필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찾아냈다. 그러나 발굴한 지 10년이 되는데도 이 글에 관한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 이는 이 글에 얽혀 있는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

○ 400년 동안 숨어 있던 금서와 조우

2003년 봄, 이 교수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지명당 하세응(1671∼1727)의 종택에서 ‘경남 서부지역의 고문서’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수많은 문서 중 ‘변무(辨誣·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힘)’라는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던 그의 눈에 어느 순간 ‘정맥고풍변’이라는 다섯 글자가 날아와 박혔다.

‘이 글이, 바로 그 정맥고풍변인가.’ 의구심을 갖고 읽어 나간 그 글은 학계에 이름만 알려졌던 내암 정인홍(1536∼1623·이 교수가 새로 고증한 생몰연도)의 정맥고풍변 바로 그것이었다. “아, 이 글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가슴이 떨렸다.

지금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고풍정맥변이 발견되기를 기대하며’와 같은 글을 볼 수 있다. 정맥고풍변은 고풍정맥변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변무에 적힌 글의 제목이 ‘정맥고풍변’이므로 이 표현이 더 정확하다.

광해군 2년(1610년) 3월 21일자 광해군일기에 “한강 정구(1543∼1620)가 친구 김우옹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시(輓詩)에서 ‘퇴계는 정맥이고 남명은 고풍이다’라고 쓴 것을 보고 정인홍이 대로하여 고풍정맥변을 짓고 정구와 절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구가 퇴계 이황을 유학의 정통(정맥)으로 높이 떠받든 반면 남명 조식(1501∼1572)은 인품이 높고 기개가 훌륭하다(고풍)는 정도로만 평가하자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내기이자 당대 유학의 양대 거두였다.

학파나 정파 양쪽에서 정인홍과 반대쪽이었던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제자와의 대화에서 “정인홍이 정맥고풍변을 지었다. 그 글이 참으로 훌륭하니 구해서 볼만하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 부록 14권(어록)에 나온다.

발굴된 정맥고풍변에 있는 ‘병오추(丙午秋)’라는 표기로 볼 때 정인홍이 이 글을 지은 것은 1606년 가을이었다. 이 글이 담긴 책 ‘변무’에는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에 대한 세간의 억울한 평가를 반론하는 글만 18편이 들어 있다. 누가 언제 왜 필사를 해뒀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 추가 연구가 필요한 문서다. 정인홍은 어떤 근거로 퇴계가 유학의 정통이라는 정구의 말에 반대했을까.

○ “퇴계가 유학의 정통이라니…”

정맥고풍변은 한자 1825자로 구성됐다. 정인홍은 퇴계와 남명 모두에게서 배운 한강 정구가 퇴계를 유학의 정통이라고 표현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먼저 “정맥이란 속마음과 밖으로 드러난 행동에 이르기까지 도(道)에 어긋남이 없으며, 사람을 대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도 털끝만큼의 사욕(私慾)이 없어야 하며, 그 논설이 모두 스스로의 것이 아님이 없고, 한마디 말도 허위(虛僞)가 없어야 하며,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귀신에게 질정(質正)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어야 바야흐로 성인(聖人)의 정맥(正脈)에 참여할 수 있다”며 “퇴계가 과연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하는 근거로 “퇴계는 홍문관에 있을 때 봉성군(鳳城君)을 죽이기를 요청하는 차자(箚子·일종의 상소)까지 올렸다고 그의 제자로부터 들었다. 또 관기를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종신토록 자신의 수발을 들도록 하였다”고 적었다.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1565) 일파가 권력을 잡기 위해 을사사화(1545년)를 전후로 봉성군(중종의 8남) 등 수많은 사람을 무고로 잡아 죽일 당시 벼슬을 내놓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성현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당시 퇴계와 쌍벽을 이뤘던 남명은 벼슬을 할 때가 아니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상필 교수는 “정인홍은 퇴계가 봉성군을 죽이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을 퇴계의 제자로부터 들었다고 표현했지만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글임을 감안할 때 정치적 학술적으로 큰 반박을 당할 수 있는 내용을 무심코 적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관기를 사랑’ 부분은 퇴계와 관기 두향(杜香)의 관계를 거론한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치 않다. 퇴계는 48세에 단양군수로 부임한 뒤 18세의 두향과 사랑에 빠졌으며 두 사람은 퇴계가 10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을 받으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정맥고풍변의 내용과 달리 이후 두향은 관기 생활을 청산하고 평생 퇴계를 그리워하며 혼자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인홍은 또 한강 정구가 남명을 고풍에 비유한 것에 대해 ‘중용의 도’를 지킨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썼다. 자신의 스승인 남명에게는 노장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풍보다 한층 높은 가치인 중도(中道)가 더 적합하다고 받든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같이 모셔야 한다는 당시 유림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회퇴변척소’를 1610년 광해군에게 올리기도 했다. 당시 문묘종사 대상자로 거론되던 또 다른 인물인 정암 조광조(1482∼1519),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일두 정여창(1450∼1504) 등은 옳은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강직한 인물이지만 퇴계나 회재는 봉성군이 죽임을 당할 때 그렇지 못했다는 주장이었다. 정인홍은 이 일로 팔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성균관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 정인홍과 남명학, 그리고 퇴계학

정맥고풍변을 쓴 정인홍은 1573년 6품직에 오른 이후 1618년 영의정에 오른 북인의 영수다. 임진왜란 때는 3000여 명을 모아 성주 합천 고령 함안 등지를 방어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에 의해 1623년 참형됐다. 영의정까지 지냈고 나이도 87세인 정인홍을 참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했다. 죄목은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비시켰다는 살제폐모(殺弟廢母)를 그가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 역사학자들은 광해군 시기를 재조명하면서 정인홍이 살제폐모를 주도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 교수는 정인홍의 후손 집에서 ‘영창대군을 죽일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쓴 상소문을 발굴했다.

이 교수는 “정인홍은 관료 생활을 오래 한 것은 아니고 생애 많은 기간을 산림(山林)에 있으면서 학식과 성품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산림정승’이었다”고 말했다.

북인의 영수이자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이 죽자 남명학파도 사라지게 된다. 남명학파는 대부분 퇴계학파 남인의 문하로 들어갔고, 일부는 서인으로 들어갔다. 이후 내내 서인이 집권을 하면서 정인홍에 대한 복권은 1908년에야 이뤄졌다. 이 같은 운명 때문에 정맥고풍변과 같은 글은 오랫동안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문서였던 것이다.

겉으로는 모두 퇴계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던 우리나라 유학에서 남명학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지금은 남명학파가 영향력을 미쳤던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경상도)를 중심으로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소 등이 설립돼 있다.

역시 정맥고풍변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조선시대 사상·정치사)는 “퇴계와 남명 모두 훌륭한 유학자임에 틀림없다”며 “정맥고풍변이 나온 것을 계기로 실천을 중시한 남명 사상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해져 우리 유학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퇴계학에만 관심이 쏠리고 남명학에 대한 관심이 적어 정맥고풍변에 대한 연구논문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실질을 숭상하고 아는 것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정신이 남아 있었더라면 18세기 실학이 도입되었을 때 부국(富國)의 측면에서 한층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진주=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퇴계학 ::

퇴계 이황의 성리학설과 사상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 분야.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 주자가 심성론에서 성(性)을 주요하게 삼은 반면 퇴계는 정(情)을 주제로 삼았다. 퇴계가 남긴 글이 많기 때문에 연구가 활발하다.  
:: 남명학 ::


남명 조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 남명은 경의(敬義)를 중시했는데, 경은 수양하는 덕목이고 의는 실천하는 덕목이다. 실천을 중시해 실천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사변주의로 흐르던 유학에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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