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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3>삼별초의 길― 류큐(琉球)왕국의 기초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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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3>삼별초의 길― 류큐(琉球)왕국의 기초를 닦다

동아닷컴입력 2010-01-09 03:00수정 2010-03-1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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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고려 전사들, 日 오키나와에 문화의 씨를 뿌리다
고려 장인이 만든 기와가 출토된 일본 오키나와 현 우라소에 시의 성곽과 요도레. 요도레는 성의 암벽을 파서 만든 왕실 무덤이다. 1994년 이곳에선 삼별초와 고려인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와가 발견돼 삼별초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됐다. 오키나와=이새샘 기자

《“어디로 가는가. 새 왕국을 세울 신천지가 어디에 있는가. 오랑캐 말발굽소리 들리지 않는, 새 고려는 어디인가. 큰 배를 타고 남으로 가면, 거기 신천지가 있다는데…. 가자. 망망대해 배를 띄워라!” 2009년 12월 1일 오후 일본 오키나와(沖繩) 현 나하(那覇) 시 국립극장에서 뮤지컬 ‘구국의 고려 전사 삼별초’가 공연됐다. 255개의 객석은 모두 찼고 로비에서도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였다. 출연진 24명은 모두 전남 진도군 주민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배우들이었다. 연출은 진도 출신의 소설가 곽의진 씨가 맡았다. 뮤지컬은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 병사와 진도 주민들이 신천지를 향해 떠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그 신천지는 어디인가. 오키나와에서 삼별초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처음 공연된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에서 진도로 - 삼별초, 고려가 40년 항전 끝 원에 굴복하자 강화성 버려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다.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40년간 항전한 고려왕조는 1270년 원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곤 삼별초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삼별초는 1219년 무신정권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가 설치한 특수부대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일컫는다.


“왕은 우리를 배신했어. 해산이라니. 더는 왕실을 따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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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反)개경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버리기로 했다. 그동안 거점이었던 강화성이 너무 노출되어 더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000여 척의 배에 삼별초 병사의 가족, 백성과 노비들이 나눠 타고 전남 진도로 향했다.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의 취약점을 노린 해도입보(海島入保·섬에 들어가 안전을 확보함) 전술이었다. 1270년 여름 진도 벽파진에 상륙한 이들은 고개 하나 넘어 용장리 용장산성에 거점을 마련하고 궁궐을 지었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남해안 일대를 공격하며 세력을 넓혔다.

승승장구하던 삼별초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1271년 봄. 고려 개경정부와 원의 연합군 6000여 명이 진도를 총공격했다. 용장산성은 함락됐다. 황제로 추대됐던 승화후 온과 배중손은 전사했다.

지난해 12월 말 찾아간 용장산성은 쓸쓸하기만 했다. 북한 개성의 고려왕궁 만월대 터를 연상시키듯 궁궐터의 돌계단만 남아 삼별초의 역사를 지켜내고 있었다.
진도에서 제주로 - 몽골군에 쫓겨 남하… 성 쌓고 대몽 항쟁 계속

삼별초의 장군 김통정은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계속되는 해도입보 전술이었다.

이들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6km의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이곳은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이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요새였다. 애월읍 바닷가에는 환해장성을 쌓기도 했다.

삼별초는 세계 제패를 꿈꾸던 원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원의 일본 원정을 방해한 일이다. 그렇게 2년. 1273년 4월 고려 개경정부와 원의 연합군 1만2000여 명이 제주도를 공격했다. 삼별초의 병력은 불과 700여 명. 전투는 치열했지만 수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김통정은 남은 병사 70여 명을 이끌고 항파두리성을 탈출해 한라산 중턱으로 숨어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파두리성은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원에 맞서 치열한 항몽전을 펼쳤던 삼별초의 격전의 장소다. 현재 남아 있는 항파두리성 토성은 1km 정도. 항몽유적전시관과 기념비가 있고 성문 문짝 받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쩌귀 등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항파두리성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화살 맞은 돌. 삼별초 병사들이 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다는 바위다. 바위 한복판에는 화살촉이 꽂히면서 생긴 듯한 구멍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바위만 남아 삼별초 병사들의 기개를 웅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오키나와로 - 대형 건축공사 통해 세력 집단화-공동체 의미 전파

전남 진도군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삼별초 기와(왼쪽)와 일본 오키나와 우라소에 시에서 출토된 기와. 연꽃무늬와 제작 방식이 흡사하다. 사진 제공 국립제주박물관


1994년 오키나와 우라소에(浦添) 시의 우라소에 성과 우라소에 요도레(성의 암벽을 파서 만든 왕실의 무덤)에서 흥미로운 기와가 대량 발굴됐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 ‘계유년에 고려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또 13, 14세기 연꽃무늬 수막새도 출토됐다. 이 수막새는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의 제작기법이나 형태가 동일했다. 용장산성 기와는 삼별초가 만든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일본 고고학계는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을 실시하고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계유년은 1273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1271년 이후 진도와 제주에서 패전한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1273년에 고려식 기와를 만들고 건물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12월 말 오키나와를 찾았을 때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오키나와현립예술대 교수는 “이들 기와는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들이 오키나와 류큐(琉球)왕국(15∼19세기)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오키나와 열도는 12세기까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신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렀던 곳. 13세기에 들어서야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집단세력이 형성됐다.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탐라와 유구왕국’전을 기획했던 손명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팀장은 “삼별초는 대형 건축공사를 통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세력의 집단화와 공동체의 의미를 전파했다. 이는 류큐왕국 건설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라소에 성이 축조된 시기도 13, 14세기다. 우라소에 요도레와 주변 성곽은 모두 깨끗하게 복원해 놓았고 나머지 성곽에서는 발굴이 진행 중이었다. 이 성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행한 우에하라 시즈카(上原靜) 오키나와국제대 교수는 “여기서 보이는 바다가 바로 한국 방향”이라고 말했다.

류큐왕국의 터전을 마련한 삼별초. 오키나와와 진도의 땅속에서 나온 기와 덕분에 삼별초의 역사, 그 영욕의 흔적이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삼별초는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집단이었다는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 1일 오키나와 나하 시 국립극장에서 ‘고국의 고려전사 삼별초’의 공연이 막을 내리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곽 씨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객석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있었고 공연이 끝난 뒤 ‘이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 ‘감동적이다’라며 저의 손을 꼭 잡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더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도 있었어요. 우리가 무심히 여겼던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선 여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강화에서 진도, 제주를 거쳐 오키나와까지 치열한 대몽항쟁의 기치를 올렸던 삼별초. 그 흔적이 되살아나 한일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강화·진도·제주=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오키나와=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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