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법률서비스 후진국’으로 가자는 변협

  • 입력 2007년 8월 29일 19시 46분


코멘트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변호사 수는 17.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적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를 못 받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내놓은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진입 장벽 현황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OECD 평균은 67.5명이며, 미국은 우리의 20배가 넘는 375명이다.

당연히 변호사 구하기가 힘들고 비용은 비싸 국민 3명 중에 2명이 변호사 도움 없이 소송을 진행한다. 전국 234개 시군구 중 변호사가 한 명도 없는 ‘무변촌’이 122곳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매년 변호사를 2000명씩 늘릴 경우 14년이 지나야 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한다. 이것도 기존 변호사들이 은퇴하거나 사망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걸리는 햇수다. 법학교수회, 시민사회단체, 국회 교육위 등이 새로 출범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전체의 입학정원을 2500∼3200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는 정원을 1200명 이내로 제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원의 80%가 변호사시험을 통과한다는 가정 아래 법조인을 지금처럼 매년 1000명 수준에서 배출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사회가 국제화, 선진화되면 법률서비스 수요의 증가 속도가 빠르고 내용도 다양해진다. 만약 현 상태라면 변호사의 도움을 못 받는 사람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법조계엔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지만 양측 의견이 기막히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법조인 수를 묶자’는 대목이다. 변협이 정원 제한을 주장하는 명분은 ‘법조인의 질 저하 우려’다. 그러면 매년 300명씩 뽑던 몇 년 전에 비해 요즘 배출된 법조인들은 질이 그만큼 떨어졌는가.

미국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캐딜락 변호사’ 논쟁이 있었다. 경제학자들이 “자동차 시장엔 캐딜락뿐 아니라 경차, 중고차도 있어야 한다. 법정에도 간이소송이 있으며 그에 맞춰 다양한 법률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 이에 대해 미국변호사협회는 “미국에는 오직 캐딜락 변호사만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만약 자동차가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캐딜락을 사야 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미국에선 다행히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법인, 개인 할 것 없이 사업자들은 규제를 싫어한다. 그러나 사업자들이 규제를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진입 규제’다. 예를 들어 문신을 해 주는 의사는 찾기 힘든데도 현재 의사 외에는 문신 시술이 금지돼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제도이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는 국민 건강을 위해 이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에 의과대 정원 축소를 요구하는 곳도 의협이다. 이처럼 기득권의 목소리가 큰 업종일수록 진입 장벽이 높다. 애덤 스미스도 일찍이 “동종 업자들이 모이면 소비자 등칠 생각만 한다. 되도록 못 모이게 하라”(국부론)고 충고했다.

로스쿨을 도입하려는 것은 다양하고 질 좋은 법률서비스를 싸게 제공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렇다면 논란은 국민 편익을 우선시하는 자세로 풀어야 한다. 법조계에 묻는다. 법의 궁극적 목적은 ‘정의 실현’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법률서비스 환경이 충분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