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기 고구려는 王-귀족 분권체제 왕권 약해”

  • 입력 2007년 8월 2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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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 분권국가였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3세기 말 지역정치 세력의 연맹체인 나부(那部)통치체제를 넘어 전제왕권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했다고 보고 있다.

조우연(인하대 사학과 박사과정) 씨는 “고구려가 4∼5세기 한반도로 진출하는 ‘남진(南進)’은 전제 왕조의 ‘국가적 정복전쟁’이 아니라 왕실이 지안(集安·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의 귀족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역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왕실만의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조 씨는 2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 배재학술지원센터에서 열리는 고구려연구회 하계발표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고구려의 봉상왕(?∼300) 안장왕(?∼531) 영류왕(?∼642) 등이 신하나 귀족들에게서 축출 또는 시해당한 것은 왕권이 지방 세력에 비해 월등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안과 평양에서 나오는 4∼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가 서로 다른 것은 고구려 전역의 문화를 장악한 전제 왕권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4∼5세기 지안의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점박이복식이 평양에서는 5세기 말이 돼서야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국원왕(?∼371)이 백제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백제보다 인구가 많았던 고구려가 월등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던 이유도 왕이 국가적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조 씨는 “소수림왕(?∼384) 이후 부족연맹체제에서 탈피해 통일된 이념이 형성되긴 했으나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봉건제도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서는 김진한(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씨는 “통설을 뒤집는 문제 제기는 참신하나 3, 4세기 고구려 왕실이 지방 세력을 일원적 관등체계로 편입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정복국가로서 고구려의 면모가 담긴 사료가 있는데 이에 대한 검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토론회에서는 이종수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연구팀장이 ‘중국의 부여사 연구현황 검토’를 통해 “중국은 1940년대 중반부터 부여를 고구려보다 먼저 자기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학문적인 작업을 해 왔다”며 한국 측의 대응 방안을 촉구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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