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비평에 대하여

  • 입력 2007년 8월 9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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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를 두 번 봤다.

애초에는 망설였다. 1980년대 기자의 대학시절 가슴을 누르던 ‘5월 광주’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을 향한 스크린에서의 재현이라는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슴 밑에서 물컹거리는 덩어리가 올라 왔다. 극장에서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았고 코를 찌르는 최루탄 냄새와 ‘짭새’의 눈도 떠올랐다. 시위 때 ‘앞서서 나간 이’에 대한 콤플렉스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두 번째 볼 때는 웃음이 나왔다. 민주화의 성전이라는 그 ‘전투’에서 왜 할리우드 영상문법이 떠올랐는지…. 처음엔 그저 그랬던 두 조연의 코믹 연기는 요즘 영화에 흔한 의도된 웃음장치였다. 한 사람씩 “기억해 달라”며 숨을 거두는 장면에선 감독이 관객을 울리겠다고 작심한 듯했다. 눈물과 웃음이 감독의 절묘한 연출 효과인 듯했다. 100억 원을 투자한 ‘상업 영화’라는 또 다른 평이 낯설지 않았다.

영화나 노래, 그림이나 소설을 보고 평이 달라지는 경험은 기자만 한 게 아닐 것이다. 개인적 체험이나 기억이 있는지, 볼 때의 기분은 어떤지, 작가를 아는지, 어디서 보는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기사도 아는 기자의 것을 보면 다르게 보인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도 다시 읽어 보면 화려한 칼춤 같은 문체를 벗어나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사랑타령이라는 가요도 열애나 이별 중인 이에게는 연애시(詩)이지 않은가. 그림도 처음 한 번 보고 사지 말라고 한다. 덜컥 샀다가 다음 날 마음이 달라져 고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 텍스트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비평을 한다. 대중은 ‘쓰지 않는 비평가’이지만 직업 평론가의 공개 비평은 작품을 좌우하는 권력이다. ‘비평가에게 중립은 열정의 결핍’(헤르만 헤세·독서의 기술), ‘비평은 쓰레기 같은 작품으로부터 독자를 구해야 한다’(쇼펜하워·문장론)는 잣대까지 들이대면 비평의 힘은 엄청나다.

그런데 비평의 환경이 관건이다. 비평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분할한다(Krinein)’에서 나왔는데, 무엇을 어디까지 분할하느냐는 문제가 있다. 텍스트를 독립된 실체로 보려는 형식주의 비평도 있지만, 기자의 경험으로 보면 텍스트 내 의미 요소들이 작품 외적인 변수와 어울려 다양한 해석을 낳는 것 같다.

‘화려한 휴가’에 대한 비평도 그렇다. 그 엇갈리는 비평들은 더 통렬한 논란으로 이어질 법한데 촌평에 멈춰 있다. 비평이 ‘광주 민주항쟁’이라는 ‘역사’에 압도됐기 때문이 아닐까.

기자는 ‘디 워’를 관객이 300만 명을 넘은 시점에 봤다. 대중의 압력이 무의식적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보기 전 “어린이 영화다” “안 봐도 된다” 등 여러 촌평을 들었다. 그래서 기대를 안 했더니 스토리 라인이 거칠지만 ‘트랜스포머’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고, 시공간을 오가는 연출 시도도 괜찮아 보였다.

극장을 나오면서 ‘디 워’를 둘러싸고 비평가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혹평과 그에 대한 감정적인 반박이 떠올랐다. ‘디 워’를 비평하는 데 ‘심형래 변수’의 영향이 컸기 때문일 것이고 그 또한 비평 과정에서 분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직 감정싸움을 벌이는 이들에게 ‘디 워’를 다시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번에는 서로의 비평을 손에 쥐고, 겸손하게 말이다. 주말에 기자도 한 번 더 봐야겠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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