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눈물로 쓴 사연, 역사의 진실을 전하다

  • 입력 2007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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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할린 지역에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이 전후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대거 발견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는 이 편지들을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 규명 작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자료 제공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
일제강점기 사할린 지역에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이 전후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대거 발견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는 이 편지들을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 규명 작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자료 제공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
한 통의 편지가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사할린 지역에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은 2만5000여 명.

이들 중 생존자와 한국에 남은 가족들 중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진상규명위)’에 강제 징용 피해 신청을 한 사람은 총 7000여 명이다.

하지만 국내에 남아 있는 서류가 없어 진상규명위는 피해자 판정 작업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러나 최근 사할린 강제 징용자들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편지들이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일제강점하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법안’이 통과되면 사망자 유족들은 2000만 원 정도의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사할린 징용자 이름 대거 파악=진상규명위는 최근 사할린에 노동자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이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1400여 통의 편지를 확보했다.

이 편지들은 태평양전쟁 뒤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 남게 된 한국인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쓴 것들이다.

편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할린의 상황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또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인근에 거주하는 다른 한국인들의 이름, 고향, 나이, 징용 시기, 현재 거주지를 기록한 명단도 여러 개 발견됐다.

진상규명위 조사1과 방일권 전문위원은 “편지에 나온 이름과 내용을 토대로 많은 사람이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 명의 ‘비공식 우체국’=1400여 통의 편지는 3명의 노력이 없었다면 국내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 편지들은 당시 한국과 옛 소련이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희팔(84·도쿄 거주) 씨와 사망한 박노학, 심계섭 씨 등 1943년 사할린에 노동자로 갔지만 일본인과 결혼해 전후 일본으로 갈 수 있었던 세 사람을 통해서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달된 것.

사할린에 남겨진 징용자가 일본에 있는 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 이들이 다시 한국의 가족을 찾아 편지를 보내 주는 방식으로 1958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들의 편지가 사할린과 한국을 오갔다. 1960년대 후반까지는 매달 200∼300통,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매달 수십 통의 편지가 사할린에서 왔다.

이 씨 등 세 명은 일본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정리하며 한국의 가족을 찾았다.

세 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 씨는 최근 대한적십자사 모국방문사업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사할린을 떠날 때 ‘제발 우리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던 동료들의 간절한 눈빛을 잊지 못해 30여 년간 사할린과 한국을 잇는 ‘비공식 우체국’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당시 주일대사관을 수차례 방문해 도움을 청했지만 우표 값으로 쓰라며 가끔씩 수십 달러를 주는 게 전부였다”고 섭섭함을 털어놨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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