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여왕 “블레어, 10년간 꾹 참았소”

  • 입력 2007년 5월 28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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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왼쪽)가 2002년 4월 총리 관저로 토니 블레어 총리를 방문했다. EPA 자료 사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왼쪽)가 2002년 4월 총리 관저로 토니 블레어 총리를 방문했다. EPA 자료 사진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 직후 수많은 국민이 버킹엄 궁 주변에 꽃을 들고 나와 애도를 표한다. 막 취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고인을 ‘국민의 왕세자비’로 칭하며 대중의 호감을 산다. 하지만 며느리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스코틀랜드의 발모럴 성에서 침묵을 지킨다….

영화 ‘더 퀸’은 보수적 원칙주의자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진보주의 정치가 블레어 총리의 대립을 담담히 보여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여왕과 총리의 불편한 관계는 그 뒤에도 10년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선데이텔레그래프는 27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블레어 총리가 남긴 지난 10년의 유산에 몹시 분노하며 좌절감을 느낀다’고 여왕의 가까운 측근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여왕은 노동당의 여러 정책에 깊은 유감을 나타냈다. 특히 여우사냥 금지 정책에는 ‘국가를 분열시킨다’며 격앙했다. 블레어 정부는 2005년 영국의 오랜 전통인 여우사냥을 금지해 농민의 거센 반발과 의사당 난입 사태를 낳았다.

여왕은 블레어 총리의 버킹엄 궁 알현 때마다 이 문제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한 측근은 “여왕의 스타일은 지방 여행 중에 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블레어 총리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며 여왕이 ‘그저 변화만을 위한 변화’에 몹시 격노하곤 했다고 전했다.

여왕은 블레어 정부가 상원 개혁과 같이 전통과 관행의 문제에도 쓸데없이 간섭했고 영국군이 국제 분쟁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며 우려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블레어 총리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허비한다고 여겼다는 것.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매년 블레어 총리와 부인 셰리 여사가 발모럴 성으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군 필립 공을 방문하는 자리는 서로의 공동 관심사가 거의 없는 가운데 불편한 긴장감만 흐른 것으로 알려졌다.

여왕 측근들은 역대 총리가 퇴임 전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마련했던 만찬마저 블레어 총리가 다음 달 27일 퇴임 때까지 준비하지 않는 게 아닌지 의심을 나타냈다. 이 신문은 만찬 일정이 잡힌 게 없고 두 사람 모두 다른 바쁜 일정만 가득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왕실 내부 소식통이 “여왕과 총리 사이에는 개인적 증오가 없으며 두 분의 관계는 좋다. 여왕은 북아일랜드 평화를 위한 블레어 총리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높이 평가해 왔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영국과 영연방의 원수이자 군 최고지도자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에 오른 지 55년이 됐으며 그동안 거쳐 간 총리가 10명에 이른다. 블레어 총리는 첫 전후세대 영국 총리로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15개월 뒤 출생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 여왕은 정치에 초연한 채 정부 정책에 대한 의견을 보좌진에도 얘기하지 않지만 간혹 측근에게 심중을 노출하기도 한다. 1986년 여왕 보좌진은 마거릿 대처 총리의 정책이 사려 깊지 못하고 대결을 낳아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여왕의 우려를 공개한 바 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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