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일지사, 동녘 그리고 이끌리오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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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출판사 창업을 준비하던 박재환 씨의 가장 큰 고민은 출판사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하는 것이었다.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여신 클리오였다. 클리오, 클리오 하다가 우연히 맨 앞에 ‘이’자를 붙여 보았다. 이클리오. 몇 번을 되뇌어 보니 이끌리오로 발음이 바뀌었다. 이끌리오, 무언가를 이끈다…. 이거다 싶었다. 이 출판사는 그의 생각대로 독자들의 마음을 많이 끌어당겼다.

그는 2001년 새 출판사를 차렸다. 주종은 과학 생태 환경이었다. 그래서 생태라는 뜻의 에코와 책이라는 뜻의 북을 합성해 에코북스로 지으려 했다. 그런데 너무 흔해 보이는 ‘북스’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같은 의미의 프랑스어 리브르로 바꾸었다. ‘에코리브로’라고 잘못 읽는 사람이 종종 있지만 박 대표는 현재 만족스럽다.

2005년 에코의서재라는 출판사가 생겼다. 여기서 에코는 생태라는 의미의 에코가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의 에코다. 움베르토 에코의 서재에 놓일 만한 책을 만들겠다는 것이 조영희 대표의 설명이다.

요즘 선보이는 출판사들의 이름은 개성적이고 재기발랄하다. 과거의 예와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출판사는 육당 최남선이 1907년 설립한 신문관(新文館). 이름엔 신문화 신문물을 소개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1950, 60년대 출판사의 이름은 엄숙하고 고풍스러웠다. 을유문화사, 일조각, 탐구당, 서문당, 일지사 등등. 전통 건축 용어인 당(堂), 각(閣)을 넣은 것도 그렇고 탐구, 일조(一潮), 일지(一志)처럼 선비적인 분위기가 깃들어 있는 것도 그렇다. 또한 훈민정음을 연상시키며 백성의 바른 소리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정음사, 민음사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와 비슷하다.

1970, 80년대엔 한자 투에서 벗어난 이름이 대거 등장했다. 한길사, 거름, 동녘, 새길, 사계절, 풀빛 등. 이들 출판사의 이름은 당시 정치 억압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이름이 그러하듯 출판사 이름도 읽기 쉽고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야 한다. 동시에 정체성도 담아내야 한다.

출판사 ‘산처럼’의 경우 작명 과정이 독특하다. 윤양미 대표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투사였던 약산 김원봉을 존경해 그의 호를 따오기로 했다. 그런데 약산으로 하자니 너무 고어체 같아서 약산을 풀어쓰기로 했다. 약산(若山)은 ‘산처럼’이라는 뜻.

산처럼 하면 푸른색(초록색)이 떠오른다. 전통적으로 푸른 산과 나무는 올곧은 정신을 상징한다. 그래서일까. 푸른색이 들어간 출판사 이름이 참 많다. 푸른숲, 푸른역사, 푸른책들, 푸른물결, 청조사(靑潮社), 늘푸른 아이들, 그린비, 그린북….

좋은 책은 늘푸른 나무, 늘푸른 산과 같아야 한다. 그게 곧 일지이고 일조가 아닐까.

이광교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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