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시간의 부드러운 손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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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부드러운 손/김광규 지음/152쪽·6000원·문학과지성사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허튼소리 하지 말게/모름지기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아야지……/그 친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힘 있게 노래했던 김광규(66·사진) 시인의 시어가 언제부턴가 친구들에게 ‘허튼소리’처럼 들렸다.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강물을 타고 흘러가는 사람들과 물가에 선 자신과의 거리는 ‘시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강은 이상해서, 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가 손 흔드는 사람들만 볼 때 시인은 그 강이 ‘돌아오지 않는 강’임을 알아차린다.

김광규 시인이 새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냈다. 그는 지난해 한양대 교수 직에서 퇴임하고 ‘전업 시인’이 됐다. “시간의 손에 등을 떠밀려 생업 현장에서 물러선 셈”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 시집을 내는 그가 “시작(詩作)에 전념할 일이 여생의 수업으로 남았으니 다행”이라고 겸허하게 말한다.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보이지 않는 손/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부드러운 손’(‘효자손’에서)이라고 노래하듯, 새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간직해 온 수첩이나 주소록을 잃어버리는 것이고(‘어느 날’), 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살다가 언제부턴가 몸 이곳저곳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고(‘몸의 소리’), 건강은 걱정 없다고 억지로 웃던 친구의 부음을 문자 메시지가 전하는 것이다(‘문자 메시지’). 쉬이 이해되는 만큼 쉬이 쓰인 것이 아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아우른 데서 느끼는 시인의 현기증은 시 곳곳에서 전달된다.

김 씨는 ‘일상시’로 잘 알려진 시인이다. 난해한 실험시가 주류인 최근의 시단에서 평이한 언어로 쓰인 김 시인의 작품은 ‘시가 쉽게 이해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장르’임을 새삼 일깨운다.

‘모처럼 캄캄하고 조용한 저녁/거북하게 코를 높인 탤런트의 인조눈물 대신/피자배달 오토바이가 방정맞게 달려가고/행인들 지껄이는 소리에 섞여/골목길에서 개 짖는 소리/옆집 아줌마가 퍼부어대는 악다구니…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웃과/동네의 소식 들려왔다’(‘잠깐 동안 정전’에서)

TV를 보던 어느 날 밤 정전으로 사방이 캄캄해졌다. 눈이 어두워지자 귀가 열렸다. 벌레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 소리가, 인조눈물 흘리는 탤런트의 가짜 울음소리에 가려졌던 것을 깨달았다. 원래 있었던 것의 소중함을 전해 주는 시인 본연의 역할을 김 씨는 충실하게 맡아 해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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