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다시 보는 국수전 명승부… ‘순국산 국수’의 탄생

  • 입력 2007년 5월 25일 03시 03분


코멘트
흑은 제한시간이 2시간이나 남아 있는 데 비해 백은 일찌감치 시간이 바닥났다. 대마의 생사도 바람 앞의 등불이다. 어떻게 살까. 빗발치듯 퍼부어대는 초읽기 속에서 주어진 1분에 목숨을 걸고 대마의 활로를 뚫어야 한다.

중앙 백 대마는 ‘가’의 한 집밖에 없다. ‘나’는 옥집이다. “아홉” 하는 소리와 동시에 백 166이 떨어졌다. 순간 조훈현 국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2시간이나 생각할 여유가 있었던 그가 어찌해 이 수를 보지 못했을까. 한 제자가 부처에게 물었다. “제 마음 속에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서로 싸우는데 종내 누가 이기겠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길 것이다.” 착각을 일으키게 한 건 살의(殺意)가 아니었을까.

참고1도 흑 1로 받으면 어떤 수가 있나. 백 2로 이단 젖히고 8에 먹여친 다음 10으로 뒤에서 모는 수가 있다. 촉촉수다. 흑 ○ 다섯 점을 이을 수가 없다. 프로에게 이 정도의 수읽기는 식은 죽 먹기다. 조 국수가 패신(敗神)에 홀려도 한참 홀린 것이다.

착각은 흑 173에 뻗을 때까지 이어졌다. 백 174가 놓이자 조 국수가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지른다. “미쳤군, 미쳤어!” 참고2도 흑 1로 버티는 것은 백 6까지 거꾸로 흑이 잡힌다. ○의 효과다. 백 178로 백 대마가 살았다. 목숨만 건진 게 아니라 흑 ○를 포획하는 엄청난 전리품까지 챙겼다. 대신 우변 백 ○가 잡히는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이 바꿔치기는 비교하나마나다.

조훈현의 10년 국수 아성은 이렇게 무너졌다. 6전7기. 7번 연속 도전 끝에 마침내 서봉수 9단이 국수에 올랐다. 국수전 30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순국산’ 국수였다. “타이틀은 뺏고 뺏기는 것. 다시 오겠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조훈현 9단은 사라졌다. 285수 끝, 백 3집 반 승.

해설=김승준 9단·글=정용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