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에서 ‘盧비어천가’까지…홍보처 요욕의 역사

  • 입력 2007년 5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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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비판 일색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23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6월 국회에서 국정홍보처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위·▶dongA.com에 동영상).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비판했다. 이종승 기자·연합뉴스
정치권 비판 일색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23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6월 국회에서 국정홍보처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위·▶dongA.com에 동영상).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비판했다. 이종승 기자·연합뉴스
국정홍보처는 정권 홍보를 담당하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정권의 나팔수’로 불리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폐합과 신설을 반복한 오욕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48년 국정홍보처의 전신인 공보처가 생긴 이래 11차례에 걸쳐 폐지, 신설, 개편을 거듭했다. 이번에 국정홍보처가 기자실 통폐합 및 기자들의 공무원 접근을 차단하는 새 취재시스템을 발표하자 국정홍보처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또다시 일고 있다.

국정홍보처의 역사는 1948년 11월 신설된 공보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보처는 비서실과 공보국, 출판국, 통계국, 방송국 등 1실 4국 체제였다. 이 중 방송국은 당시 국영방송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던 기구다.

공보처는 1956년 2월 폐지되면서 대통령 소속의 공보실로 바뀌었다가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 공보부로 변모했다. 이후 다시 문화공보부(문공부)로 개편돼 1990년 1월까지 29년간 유지됐다.

공보처, 문공부 등 국정홍보처의 전신 기관들은 1959년 경향신문 폐간, 1980년 언론 통폐합, 언론기본법 제정 등 대한민국 현대사에 지워질 수 없는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건에 앞장섰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 문공부는 이원홍 장관, 허문도 차관 시절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는 등 언론 통제의 첨병 역할도 했다.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부의 공보실은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던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경향신문을 폐간한 이승만 정부는 1년 뒤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신문은 복간됐다.

1996년 1월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가 발표한 전두환 전 대통령, 허삼수 씨 등의 구속영장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6월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 분과위원 등이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정비계획’을 보고받고 문교공보 분과위에 ‘언론계 자체 정화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촬영:이종승 기자

전 전 대통령은 이를 당시 이광표 문공부 장관에게 전달토록 한 뒤 7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 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후 신군부는 언론인 해직 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하도록 했고, 그해 10월까지 총 933명의 언론인이 해직됐다.

또 당시 신군부는 같은 해 11월 중앙 언론사주들을 소집해 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1도 1사 원칙에 따른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신군부가 1980년 제정한 ‘언론기본법’도 당시 문공부 장관에게 신문사 정·폐간권을 줘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데 이용됐다.

김영삼 정부는 1990년 1월 문공부를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했다. 하지만 공보처도 ‘정권 홍보의 전위대’라는 비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오인환 공보처 장관은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임명돼 문민정부가 끝난 1998년 3월 2일까지 5년 동안 자리를 지키는 등 실세 역할을 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공보처가 언론 통제의 중심적 역할을 해 왔다”며 ‘공보처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집권과 동시에 공보처를 폐지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폐지 1년 3개월 만인 1999년 5월 지금의 국정홍보처를 신설해 사실상 공보처를 부활시켰다. 그 대신 언론매체에 대한 관리 기능은 문화관광부에 남겨뒀다.

공보처 부활은 체계적인 국정홍보가 필요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참여정부 들어서 국정홍보처가 여론의 반발을 산 사안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

2005년 11월 한나라당 정종복 의원은 “국정홍보처가 정권 홍보에만 치우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했고, 정부 부처 정책홍보관리관실의 업무와 중복돼 예산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며 폐지 법안을 냈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업무보고 발언을 모은 ‘노무현 따라잡기’라는 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펴내면서 정부 예산 6000만여 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 의원은 “‘노 대통령을 여러 번 뵙고 핵심을 꿰뚫고 들어가는 기백, 뛰어난 정치적 상상력을 배웠다’는 등 ‘노(盧)비어천가’에 가까운 내용의 책을 개인 이름으로 내 시중에 판매하면서 국가 예산을 사용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국정홍보처는 지난해 11월 문화일보 연재소설의 선정성을 이유로 절독을 선언했고 올 1월에는 정책광고 사전협의 시스템을 가동해 150여 개 정부 부처와 공기업을 대상으로 광고 내용 및 집행에 간섭했다.

유재천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특임교수는 “국정홍보처는 권력과 언론의 분리가 강조될 때는 위상이 축소됐다가, 권력이 언론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싸우거나 봉쇄하려고 할 때 몸집 불리기를 반복했다”며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야 하는 국정홍보처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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