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 다잉’…죽음도 교육이 필요하다

  • 입력 2007년 5월 18일 20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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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1시 죽음준비교육 지도자과정 교육이 이뤄지고 있던 서울 중구 정동 성 프란치스코 회관 307호 강의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양 발끝이 벌어지기 때문에 발을 끈으로 묶는 겁니다. 한 분씩 앞으로 나오셔서 시신 역할을 해 주시죠."

천주교 의정부 교구 소속 이 율리아나 수녀의 수시(시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 시신이 굳기 전에 수족을 주물러 바르게 펴고 묶는 절차)에 대한 강의가 실습을 통해 이뤄졌다.

좁은 강의실은 수강생 50명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찼다. 대부분 50~60대 중장년이지만 30대도 눈에 뜨였다. 마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처럼 강의에 열중했다.

한 중년 한 수강생이 앞으로 나가 긴 책상 위에 발을 쭉 뻗어 앉았다. 율리아나 수녀가 한지 두 장을 접어 만든 끈으로 발목을 묶으며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뒷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은 고개를 빼서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주시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회장 홍양희)는 2002년부터 매년 두 차례 씩 이같은 강좌를 열고 있다. 각 종교와 문화권에서 바라보는 죽음의 정의와 사후의 세계 등 이론적인 내용도 있지만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 사전 유언장을 작성하는 방법, 임종을 준비하는 자세, 시신을 수습하는 방법 등 현실적으로 필요한 기법도 가르친다.

수강생 김복순(59·여) 씨는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죽을 준비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죽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줄었고 남은 삶이 한층 귀하게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수강생의 사연도 다양했다.

항공사 조종사 출신인 성길웅(66) 씨는 비행기 사고로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이 강의를 듣게 됐다. 성 씨는 이후 양로원과 노인복지 센터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노인들에게 유언장을 나눠 드리고 유언을 미리 써보게 한다. 성 씨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 내가 놀랄 정도"라며 "사전 유언장을 받은 배우자와 자녀들이 '건강한데 무슨 유언이냐'며 놀라다가 나중에 좋은 생각이라고 이해해 주더라는 노인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웰 다잉'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는 아직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교계가 운영하는 일부 중고교가 죽음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하고 있지만 공교육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숫자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 숫자 판에서 '4'자를 아예 빼버리는 곳도 있을 정도로 죽음은 금기 중 금기에 속한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개설된 죽음과 임종에 관한 과정이 1970년대에 이미 1000개를 넘었다.

고려대 교육학과 강선보 교수는 "미국 초등학생들은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 토론하거나 동식물의 생활사 등을 통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고 있다 "면서 "한국도 지금까지 터부시해 온 죽음 준비교육을 공교육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암센터 소장 허대석 교수는 "의료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회생 가능성이 희박했던 환자들도 기계에 의존해 생존 기간을 연장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면서 "죽음에 대한 환자나 보호자의 인식이 거의 변하지 않아 삶을 정리할 기회도 없이 오랜기간 고통스럽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다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변화된 환경과 기술에 맞춰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환자나 보호자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이정권 교수는 "죽음을 의료의 실패로 규정하는 데 익숙한 의료계의 문화도 문제"라면서 "이러한 문화는 환자들이 완화치료나 가정치료 등을 택해 차분히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잘 죽는 것(well-dying)이 잘 사는 것(well-being)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호스피스협회 회장인 건양대 의대 강영우 교수는 "웰 다잉에 대한 준비가 덜 된 환자일수록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경우가 많다"면서 "힘들게 정복한 산도 언젠가는 내려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 또한 하강하는 것임을 깨달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평소에 유서를 쓰는 습관을 들이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권유하고 있다. 유서를 통해 죽음을 앞둔 삶이나 장례 절차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하면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일부 대기업이 사원 연수프로그램으로 유서쓰기를 하는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글쓰기기 부담스럽다면 캠코더를 이용해 동영상 유서를 제작할 수도 있다.

친구나 가족과 함께 주변 공원묘지나 국립묘지 등을 가볍게 둘러보는 것도 죽음을 준비하는 좋은 방법이다. 묘지를 둘러본 소감이나 느낌을 나누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달을 되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된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의 홍 회장은 "앨범에서 자신의 사진을 꺼내 펼쳐보면서 지난 삶을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죽음의 준비가 된다"면서 "사진에 비친 자신의 인생을 종이 위에 높낮이 곡선으로 표시해 본다면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우정열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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