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배당의 미학

  • 입력 2007년 5월 17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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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똑같은 일을 다른 대기업 총수가 당했다면 그 기업에선 어떻게 대처했을까.

최근 세간에 떠도는 우스개는 이렇다.

‘삼성=어떻게 대응할지 빨리 보고서를 만들어 올려라. 현대=불도저를 끌고 가서 북창동을 싹 밀어 버려라. LG=삼성 같으면 어떻게 대응했을지 빨리 알아봐라.’

이들 대기업 각자의 이미지가 어떤지를 엿볼 수 있는 패러디다.

그렇다면 처음 이 사건의 첩보보고를 접한 경찰 수뇌부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사건을 되짚어 보면 서울지방경찰청은 첫 조치로 남대문경찰서에 첩보보고서를 넘겨 수사하도록 했다. 이후의 수사 과정 전반에 관한 감찰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 결과를 봐야겠지만 이때부터 수사는 꼬이기 시작했다.

한화 측이 초기 대응을 그르쳐 사태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경찰 역시 첫 조치에서부터 오류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모든 수사가 그렇지만 첫 단추는 수사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라는 ‘배당’의 문제다. 김 회장 사건과 관련해 검찰 역시 내부적으로 배당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조직폭력배가 개입돼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서울중앙지검 내에서는 수사 지휘부서를 형사부가 아닌 마약조직범죄수사부(옛 강력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검찰 수뇌부는 “미리 ‘조폭 사건’으로 단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며 계속 형사부에서 지휘하도록 했다.

지금 막바지 수사가 진행 중인 제이유그룹 로비 의혹 사건은 배당의 실패가 검찰 조직 스스로 큰 상처를 입는 것으로 이어진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지난해 초 서울중앙지검 특수1∼3부가 모두 중요 사건을 다루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제이유 사건은 서울동부지검에 배당됐다. 아무래도 수사 인력 규모 등 여러 면에서 한계가 있는 이곳에서 수사는 1년 가까이 힘겹게 진행됐다.

결국 피의자 강압 수사 시비가 일면서 서울동부지검은 검사장이 자진 사퇴하고, 차장 및 부장검사가 좌천성 인사 조치를 당하고, 평검사 1명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는 불명예를 안고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로 넘겨야 했다.

마치 종합병원으로 가야 치유될 병이 있고 일반 개업의를 찾아가도 되는 병이 있는 것처럼 제이유 사건은 적어도 서울동부지검으로 미룰 일은 아니었다.

반대로 수차례 영장이 기각되는 수모를 겪었던 ‘론스타 사건’은 과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직접 나섰어야 했느냐는 뒷말이 나왔다. 대검이 직접 나서다 보니 그 부담을 검찰 수뇌부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영장 기각 사태에 이르러서는 법원과 검찰 수뇌부가 충돌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사건 배당은 수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자 ‘용병술’의 문제다.

이뿐만 아니라 법원과 검찰에서는 ‘배당 비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를 둘러싼 로비와 잡음도 적지 않다. 사건 배당 단계부터 로비의 입김이 작용하면 은밀하게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후 로비’보다 더 질이 나쁘다.

수사의 실패는 수사팀에 책임을 물으면 되지만 사건 배당의 실패는 결국 각 수사기관을 지휘하는 장(長)의 책임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검경 수뇌부가 최근의 사건 수사에서 꼭 돌이켜 봐야 할 대목이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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