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조선인가도 되밟으며 “한일 상생 공감”

  • 입력 2007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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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607년 2월, 조선 정부는 467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조선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표명하면서 국교 재개와 사절단 파견을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일본행은 한양에서 부산을 지나 일본의 쓰시마(對馬) 섬, 교토(京都)를 거쳐 에도(江戶·지금의 도쿄)까지 육로와 뱃길을 합해 왕복 1만1000리를 오가는 약 10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통신사 파견은 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이어졌고 규모는 매번 300∼500명이었다.

처음에는 다분히 정치적이었지만 파견이 거듭되면서 조선통신사는 한일 간 선린 외교와 문화 교류의 첨병 역할을 했다.

2007년은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이 되는 해. 지금 일본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 우정 걷기 대회’(한국체육진흥회 일본워킹협회 공동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가 열리고 있다.

본보 기자가 이에 동참해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400주년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통신(通信)은 ‘신의로 통한다’는 뜻. 분위기로 치면 400년 전 통신사 못지않은 믿음이 느껴졌다. 서울을 출발한 게 지난달 1일이니, 통신사의 옛길을 따라 걸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얼굴은 시커멓게 탔고 몸에선 땀 냄새가 진동했지만 모두 표정이 밝다.

지난달 29일 밤 도착한 일본 시가(滋賀) 현 모리야마(守山) 시에서 참가자들은 저녁을 함께했다. 한 일본 참가자가 건배를 제안하자 일동이 약속한 듯 외친다.

“우리가 남이가! 지화자 좋다! 우리는 하나다!”

어느새 웃음꽃이 만발한다.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 우정 걷기 대회’ 참가자들의 평균 나이는 65세. 이 행사에서 양국 참가자 30여 명은 지난달 1일 서울을 출발해 부산, 쓰시마 섬, 오사카(大阪), 교토를 거쳐 도쿄(東京)까지 총 576km(뱃길 제외)를 걷고 있다. 16일 도쿄 왕궁에서 46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 아침 참가자들은 교토의 산조(三條)대교 밑에 모였다. 산조대교는 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길에 꼭 지나던 다리다. 1748년 10차 통신사 조명채는 이 다리가 ‘좌우의 난간 기둥에 청동으로 만든 덮개를 씌웠는데 크기가 한아름은 되겠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 다리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다.

교토는 부산부터 바닷길을 이용하던 통신사가 오사카에 배를 대고 육로로 행렬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교토의 호코(方廣)사 다이부쓰덴(大佛殿)을 찾았다. 여기는 통신사에게 불미스러운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1719년 일본이 이곳을 통신사 연회 장소로 정한 게 화근이었다. 다이부쓰덴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발원해 지은 것. 당시 통신사는 “도요토미는 백세(百世)의 원수”라며 연회를 거부했지만 결국 연회는 열렸다. 조선으로 돌아온 통신사는 지탄을 피할 수 없었다. 이날 찾은 호코사는 빈 터에 표지석만 남아 당시의 팽팽했던 긴장감을 전한다.

교토 고려미술관에선 조선통신사 400주년 기념 특별전 ‘성신(誠信)의 교류’가 27일까지 열리고 있다. 큐레이터인 재일교포 이순해 씨는 “특별전 이후 관람객이 평소의 3배 이상 늘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교토를 떠난 통신사는 모리야마(守山)사 도몬인(東門阮)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참가자들은 이곳 승려에게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본래 본당 정면 높은 벽에 1748년 10차 통신사 황구성이 남긴 ‘守山寺’ 서액이 걸려 있었지만 21년 전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황금색 편액이 걸려 있지만 고풍스러운 멋은 찾아볼 수 없다.

모리야마로 가는 길에 들른 도라이진(渡來人)역사관의 자문위원 후나하시 간지 씨가 ‘21세기 통신사’들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줬다. 그는 이날 밤늦게 느닷없이 숙소를 찾아와 “통신사의 정신인 공생(共生)을 계승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모리야마를 떠난 참가자들은 통신사가 지났던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에 접어들었다. 조선인가도는 시가 현 야스(野洲)에서 히코네(彦根)에 이르는 40km 구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막부(幕府)의 장군만 이용하는 길을 통신사에게 열어 준 것은 일본이 통신사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 이날도 일본 주민들이 참가자들을 반갑게 맞았다.

통신사가 점심을 먹었다는 오미하치만(近江八幡) 시의 니시혼간(西本願)사 하치만(八幡) 별원(別院)에는 1711년 8차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이 지은 망향가(望鄕歌) 칠언시가 남아 있다. 이곳의 승려는 “본래 이 고장은 흙으로 만든 도기만 만들다가 통신사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유약을 발라 굽는 자기 기술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히코네에서 통신사에 대한 접대가 특히 융숭했다는 소안(宗安)사를 찾았다. 당시 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 사찰 규칙을 어기고 고기와 술을 들여왔다고 한다. 사찰의 제일 좋은 방에는 한 통신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통신사는 이처럼 일본 곳곳에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깊게 남겼다. 최초의 진정한 한류(韓流)라 할 만하다. 한국체육진흥회 선상규 회장은 “우리는 통신사가 자기 지역을 지나갔는지 모르는데 일본은 통신사 관련 문화재는 작은 것까지 소중히 보존한다”며 “통신사를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만 생각지 말고 한일 민간교류의 미래를 제시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토·모리야마·히코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조선통신사 옛 기록 보니

1636년 ‘달마도’로 유명한 조선의 화가 김명국이 4차 조선통신사 사절단에 뽑혀 일본의 쓰시마 섬에 도착했을 때다. 김명국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일본 학자와 문인들이 몰려나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심지어 숙소 밖에 줄 지어 밤새우는 사람도 많았다.

오사카에 도착하자 달마도를 그려 달라는 일본인들이 또 줄을 섰다. 그중에 누군가가 “우리 집에 벽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술을 좋아하는 김명국은 “술부터 먼저 내오라”고 했다. 김명국이 계속 술만 마시자 안달이 난 일본인은 칼을 들고 나와 “빨리 그려 주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이 정도에 기가 죽을 김명국이 아니었다. 한참을 더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자 그제서야 김명국은 일본인이 내온 금가루를 입 안에 머금은 뒤 힘껏 내뱉어 한 폭의 금가루 추상화를 그려 주었다. 그 일본인은 김명국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조선통신사는 1682년 7차 파견 때부터 문화사절단의 성격이 짙어졌다. 문인 학자는 물론이고 아예 전국 팔도에서 글 그림 잘하는 사람, 악기와 춤의 명수들을 선발해 사절단에 포함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일본의 숙소 등에는 사절단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의 통신사 접대도 대대적이고 열광적이었다. 300∼500명 규모의 사절단이 쓰시마 섬에 도착하면 무려 500척의 배가 나와 통신사를 맞이했다.

히로시마(廣島)에서는 숙식 준비에만 1000명이 동원되었고 최고급 음식을 내놓기 위해 하루아침에 꿩 300마리를 잡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조선 후기,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궜던 한류 열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00년 전 조선인가도 되밟으며 “한일 상생 공감”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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