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제라르 뱅데]모차르트, 당신은 누구십니까?

  • 입력 2006년 2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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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든 성당이 종을 울렸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이었다.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기였던 1991년에 그랬던 것처럼 각종 행사가 줄을 잇고, 상인들은 상상력 대결을 펼치고 있다.

티셔츠, 커피잔, 모자 같은 기념품은 물론이고 초콜릿, 소시지 같은 먹을거리에도 모차르트의 이름이 새겨졌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현상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를리오즈의 이름을 딴 포도주를 만들지 않는다. 독일에서 베토벤의 이름을 딴 소시지가 판매되는 일도 없다. 모차르트라는 특별한 ‘브랜드’만 가능한 일이다.

모차르트의 성공은 아들에게서 특출한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낸 아버지 레오폴트 덕분이다. 모차르트를 이끌고 유럽 각 도시를 돌며 돈벌이에 나선 레오폴트를 아들을 혹사시킨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모차르트로서는 여행이 음악적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였다. 당대 유명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새로운 악기를 접할 수 있었다. 또 이탈리아에선 오페라를 배웠다.

모차르트는 음악에 관한 한 예외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가 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음악은 대중적이면서도 복잡하다. 모차르트 음악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접근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음악을 이해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음악은 달아나 버린다. 세계의 유명 지휘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더는 파고들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차르트 음악의 비밀이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음악은 삶의 은밀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성격은 다면적이었다. 그는 삶을 사랑하고 여자들을 사랑했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젊고 예쁜 학생들에게는 기꺼이 음악을 가르치는 호색한이었다. 사촌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의 호색한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는 천재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기쁨과 좌절, 희망을 가진 한 인간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사생활과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철저하게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머니가 숨진 직후에도 즐거운 내용의 작품을 썼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민주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마술피리’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독일어로 썼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게다가 이 작품은 왕립극장이 아닌 교외의 극장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연됐다.

모차르트는 1786년 작 ‘피가로의 결혼’에서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을 공공연히 표현했다. 당연히 이 작품은 귀족들에게서 냉대를 받았다. 이듬해 작품인 ‘돈 조반니’에서 모차르트는 더욱 직설적으로 나선다. “일하기 싫고, 더는 하인으로 살기 싫다”는 내용의 하인의 노래로 작품이 시작된다.

음악가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한 사람도 모차르트였다. 당시 모든 음악가가 왕과 대주교에게 묶여 지내던 현실에서 그는 대주교의 곁을 과감히 떠났다. 역사상 최초로 작곡과 작품 공연으로 먹고사는 프리랜서 음악가가 된 것이다. 모차르트 이후 음악가들은 한층 자유로워졌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숨졌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삶, 그의 작품, 미완(未完)으로 남은 레퀴엠은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모차르트, 당신은 진정 누구십니까?”

제라르 뱅데 에뒤 프랑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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