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YMCA

  • 입력 2006년 2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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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거리는 우리 근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19세기 말 근대국가를 향한 개화운동이 이곳에서 싹이 텄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잉태됐다. 일제는 한반도를 점령한 후 서울의 남북 중심축인 광화문-태평로-숭례문-용산 일대에 식민통치를 위한 시설을 집중시킨다. 수도의 핵심 공간을 장악해 지배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일본인들은 이 축과 연결되는 청계천 남쪽에 주로 거주했고 조선인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그 위쪽의 북촌이 생활의 근거지였다.

▷3·1운동이 종로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로에 모여 있던 종교 사회단체, 그리고 북촌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룬 거사였다. 민족운동의 거점으로서 종로를 대표하는 곳이 YMCA였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로 출발한 서울YMCA는 1908년 종로2가에 3층짜리 벽돌로 된 회관을 신축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건물이 마치 산과 같다.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건물도 돋보였지만 활동 면에서도 민족 교육과 계몽의 중심이었다.

▷광복 후 서울YMCA는 민주화와 시민운동의 일선에 선다. 100년 역사를 통해 변함없이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 온 것이다. 이곳이 최근 성차별 논쟁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은 의외다. 서울YMCA가 총회원 자격을 ‘남자’에서 ‘사람’으로 바꾼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영맨(Young Man)’으로 시작되는 이 단체 명칭 때문에 ‘남자’만 활동하는 단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의 운영 참여가 막혀 있었다. 이사회가 여성에겐 총회 참석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총회원 자격을 다시 ‘사람’에서 ‘남자’로 되돌리고 예외적으로만 여성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개정안을 공고했다. 문제가 확대될 수밖에. 좋은 기억이 지워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와 공정이 주어지기 위해 일한다’는 YMCA의 첫 번째 원칙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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