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DJ와 도청 수사 조율한 盧정권의 이중성

  • 입력 2005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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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국무총리가 불법 감청(도청)에 개입한 전직 국가정보원장의 사법 처리 수위를 사전 조율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의 불구속 가능성을 언급하며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총리는 두 사람이 적절한 선에서 유감을 표명하면 불구속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하고 DJ의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구속영장은 검사의 청구에 따라 법관이 발부하도록 헌법과 법률에 명시돼 있다. 구속 여부의 판단 기준 역시 헌법과 법률이다. 이 총리의 행위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고 사법부의 권한까지 침해한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이 총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DJ 측은 도청 개입 사실을 잡아뗐고, 법원이 증거 인멸을 우려한 검찰의 청구를 받아들여 15일 영장을 발부했다. DJ가 이 총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 검찰에 압력을 넣고, 그래도 안 되면 법무부 장관이 “불구속 수사하라”고 또 지휘권을 발동했을 것 아닌가.

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권력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기관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냈다’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헌정 사상 유례가 없었던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강정구 사건’ 수사지휘권 발동과 이 총리의 이번 헌법 위반 행위를 보고도 그런 말을 믿을 국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천 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수사 상황을 보고한 뒤 이 총리가 DJ를 방문한 것은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였음을 말해 준다. 국민에게는 도청을 뿌리 뽑았다고 내세우면서 뒤로는 호남 민심에 영향력이 남아 있는 DJ와 정치적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이 총리 측은 “아는 바 없다” “그게 문제가 되느냐”며 무책임하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흥정의 전모를 밝히고 헌법 위반 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검찰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임 씨와 신 씨의 구속이 불가피하다면서도 법무부 장관에게 불구속 수사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의 처리 방향에 대해 낱낱이 보고함으로써 정권 차원에서 ‘조율’에 나서도록 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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