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2005년 문화생활 백서

  • 입력 2005년 11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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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뮤지컬 공연장에 관객들이 넘친다. 좀 난해한 클래식 공연도 성황을 이룬다. 기업에선 문화 마케팅이 새 화두로 등장했다. 극장을 통째로 빌려 고객을 위한 문화행사를 갖기도 한다. 올해도 술에 찌든 망년회 대신 우아하게 공연을 관람하며 한 해를 마감하는 ‘문화 송년회’가 인기를 끌고 있다.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에 새로 문을 연 성남아트센터는 1600억 원을 들여 만든 공연장답게 웅장하고 화려하다. 1800석의 오페라하우스, 1000석의 콘서트홀, 400석의 소극장에 미술 전시장까지 갖추고 있다. 서울 외곽에 있지만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시설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공연들의 객석 점유율은 70∼80%에 이른다. 분당뿐 아니라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문화공간을 짓는 일에 앞 다투어 나서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뮤지컬 공연장은 텅 빈 객석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지방은 문화의 불모지대로 불렸다. 어디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고소득층, 고학력층이 문화생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지난 몇 년간 대대적인 영화 관람 붐이 일면서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다른 문화행사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 2005년 문화계에선 획기적인 지각변동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다.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문화 격차가 두드러지고 있다. 문화생활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시간과 돈이다. 돈이 많아도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 문화를 즐기려면 안목과 식견을 갖춰야 하므로 문화생활은 고도의 소비행위에 속한다.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로 소득 상위계층 사람들이다.

인기가 급상승한 뮤지컬이 올해 연간 100만 명의 관람객을 처음 돌파한다고 해서 뮤지컬 관계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그래도 전체 인구 규모와 비교하면 일부에 머물고 있다. 대다수는 고급한 문화생활과 별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컴퓨터를 잘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눠지는 ‘디지털 디바이드’보다 심각한 게 ‘문화 디바이드’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문화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패션 디자이너가 벌어들이는 소득은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뛰어난 디자이너는 어릴 적부터 문화를 가까이 접하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기간 축적된 문화적 훈련의 토대 위에서 재능과 노력이 결합할 때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다. 문화적 혜택을 못 받고 자란 아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지기 십상이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달릴 수 있고 예술을 통해 멈출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문화생활은 이제 삶의 여유와 재충전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문화생활을 통해 상상력과 창조력이란 소중한 자산을 획득하게 되므로 ‘예술을 통해서도 인간이 달릴 수 있는’ 시대를 맞고 있다. 문화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중산층의 문화 참여를 늘리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문화생활에 적극적인 의향과 자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적절한 문화정책이 필요한 시기다. 그러면 ‘문화 중산층’이 확대될 것이다. 국민 전체의 문화적 안목을 키우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효과적인 지름길이다. 강대국 틈에 끼여 있는 한국이 지향할 바가 바로 문화강국 아닌가.

한국의 자존심 ‘한류 열풍’은 언젠가 막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기반이 튼튼해지면 제2, 제3의 한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급격히 달아오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 열기를 생산적으로 발전시킬 지혜를 찾아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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