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대북경협 보류]대북정책 변화? 鄭통일 견제?

  • 입력 2005년 11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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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남북협력공사 설립과 포괄적 대북(對北) 경제협력 방안의 본격적인 추진 시점을 늦추도록 한 것은 그동안 현 정부가 대북 지원에 호의적이었다는 점에 비춰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따라 정부 안팎에선 노 대통령의 대북 정책 기조에 변화가 생긴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이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 주도의 남북협력공사 설립에 제동을 걸었다는 측면에서 정계 복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정 장관을 ‘견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정치적 의미가 담긴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북 정책 기조 변화인가=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를 두고 ‘대북 정책 기조 변화’와 ‘대북 지원 자금 충당을 위한 시간 벌기’라는 두 가지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대북 경협 업무에 오랜 기간 종사해 온 한 인사는 6일 “노 대통령이 변했다”고 말했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한다’며 미국 보수파의 대북 압박 정책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던 노 대통령이 대북 지원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게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지난달 말 개성에서 열린 11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남측이 북측에 ‘주고받는’ 원칙을 강조하며 일방적인 지원을 거부한 것과 맞물려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 변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내에선 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진전돼 대북 정책을 위한 자금 조달 방안이 원활해질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단순한 정책적 판단이라는 설명도 있다.

정부의 재정 여건 등을 감안할 때 통일부가 추진하는 남북협력공사 자금 조달 방안에는 문제가 있다는 기획예산처의 실무 판단을 노 대통령이 존중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정부 당국자는 “노 대통령은 기획예산처로부터 통일부가 만든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 중 국내외 자금을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보고를 받고 공사 설립 추진 시점을 늦추도록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적 의미 있나=정 장관은 지난달 10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대북 경협과 북한 경제를 전담해 나갈 공기업인 남북협력공사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통일부는 정 장관 발언이 끝나자마자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에선 정 장관이 청와대 및 관련 부처와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을 놓고 협의를 마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가 열린우리당 복귀 이후 정 장관이 독주를 할 경우에 대비해 ‘경각심’을 주려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일부 인사들은 정 장관과 김근태(金槿泰) 보건복지부 장관이 당에 복귀할 경우 여권의 힘의 중심이 당으로 쏠리면서 노 대통령의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을 부추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여권 내 ‘범 정동영계’는 결속력은 강하지 않지만 최대 다수계파라는 평가다.

또 정부 일각에선 변양균(卞良均) 기획예산처 장관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통일부의 독단적인 대북 경협 관련 자금 조달 방안을 비판한 게 노 대통령의 의중을 읽었거나 청와대와 교감을 가진 결과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남북협력공사 설립과 같은 중요한 사안을 미리 보고받지 못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6자회담 영향은


9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제5차 6자회담에서는 9월의 4차 6자회담에서 합의한 공동성명의 내용을 이행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된다.

정부는 이행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시작부터 끝까지 명시한 로드맵 작성을 원하고 있다. 북측이 핵무기와 시설,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동결한 뒤 이를 검증하고 폐기해 나가는 단계마다 구체적으로 북측에 어떤 보상을 해줄지를 미리 결정하자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협력공사 설립과 포괄적 대북 경제협력의 본격적인 추진은 북한 핵 폐기의 구체적인 이행 계획 합의와 연계돼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6자회담이 △핵 폐기와 상응 조치 △북-미 또는 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 주제별로 나눠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 등은 ‘핵 폐기와 상응 조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에 대한 보상 방안으로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 등이 지렛대 역할을 제대로 할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심사다. 북측은 핵 폐기 이행 계획 동의에 앞서 “남북협력공사 설립과 포괄적 대북 경협 방안의 실현을 보장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남측이 선뜻 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핵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야 남북협력공사 설립 등의 핵심 조건인 국내외 자금 조달이 원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6자회담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통일부 추진 남북협력公 보류 배경


통일부가 추진하는 가칭 ‘남북협력공사’ 설립이 보류된 것은 공사의 실체가 모호한 데다 재원 조달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획예산처는 “지난달 통일부가 남북협력공사 설립을 추진한다는 얘기를 듣고 검토해 봤지만 전반적인 계획이 모호해 당장 설립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6일 밝혔다.

통일부가 제안한 남북협력공사가 정부 주도형인지, 민간 주도형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아 재원 확보 방안을 세우기 애매했다는 설명이다.

예산처 관계자는 “민간 주도형 공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더라도 어느 기업체가 재원을 부담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남북협력 사업을 주관하기 위해 별도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토지공사, 한국도로공사, 대한주택공사 등 남북협력 사업을 주관할 수 있는 여러 공기업이 있는데 공사를 하나 더 설립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통일 비용과 관련해 예산처는 독일을 모델로 연간 비용을 추산할 뿐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변양균 예산처 장관은 4일 기자간담회에서 “독일은 1990년 통일 후 15년간 매년 107조 원씩 총 1600조 원을 투입했다”며 “이는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5%에 이르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남북한 경제력 차이가 큰 만큼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식으로 통일하면 매년 GDP 대비 5% 안팎의 비용이 들 수 있다”면서 “일부 학자는 (통일 후) GDP의 10%를 통일 비용으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2000년 이후 경수로 등 대북 지원에 연 평균 5700억 원을 투입해 왔다.

내년 통일분야 예산은 올해보다 84.4% 증가한 1조5623억 원으로 국회에 상정돼 있다. 내년 GDP(790조 원 예상) 대비 0.2%로 아직 높지는 않지만 증가 속도가 빠른 데다 통일 이후를 대비하려면 재정에 그다지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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