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충식]‘亡國기념일’ 손정의 박무덕을 생각한다

  • 입력 2005년 8월 3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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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세상의 20년 앞을 그려 본다. 20년 앞의 미래상은 대체로 빗나가지 않는다. 거기서 거꾸로 15년, 10년, 5년을 역산해서 변화를 예측한다. 곧장 2, 3년 앞만 내다보면 변화가 심해서 예측이 빗나가기 쉽다. 그러니 처음부터 메가 트렌드(거대 조류)로 보면 미래는 단순해지고 2, 3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가 선명해진다.”

꿈꾸는 미래학자의 객담이 아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재벌 손정의(孫正義) 씨가 며칠 전 NHK에 출연해서 한 얘기다. 그는 최근 중국에서 인터넷 상거래업체(알리바바닷컴)의 주식 거래로 단숨에 13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비록 IT 거품이 꺼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호이고, 영향력도 건재하다. 그는 10년 전에도 이렇게 말했다.

“대양을 건너는 선장은 당장의 파도나 날씨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목적지 항구에 다다르도록 항로가 바른가, 계기반과 기관, 조타가 정확히 돌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당장의 파도에 흔들리고 고민하면 자격 없는 선장이다. 기업가는 일희일비해선 안 되며, 목표만을 그려 보며 지표와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가야 한다.”

손 씨는 재일동포 3세다. 한일강제합방이라는 국치(國恥)로 흩날려 가 피어난 민들레꽃 같은 존재다. 재일 한국인이 다 그랬듯이, 그의 윗대도 막노동과 양돈(養豚)으로 비참하게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돼지 먹일 음식쓰레기 수거용)를 타고 놀다가, 그 안에서 미끄러졌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망국(亡國) 기념일’(29일)에 손정의의 경영론을 떠올리며 대한제국 말기를 생각해 보았다. 대원군, 명성황후, 고종 그리고 김옥균, 박영효가 미래상과 비전을 가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20년 정도, 아니 10년이라도 장래를 머릿속에 넣고 정쟁(政爭)을 벌였더라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 기업인은 20년 정도를 상정하며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의 인물이 떠오른다. 일본 외상을 2번 지낸 박무덕, 즉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다. 1597년 왜군의 정유재란으로 잡혀간 도공(陶工)의 후예, 말하자면 국난의 파도에 휩쓸려 기술 노예로 잡혀간 핏줄이다. 그는 철들 무렵까지 박무덕으로 불렸다.

그는 일본이 미국을 기습 공격하던 1941년과 패전하던 1945년 두 차례 외상을 맡았다. 미군의 진주와 더불어 전범(戰犯)이 되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6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의 회고록(‘시대의 일면’)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과학의 수준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전쟁의 승패는 물자의 소모를 생산력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느냐가 좌우해 왔다. 전쟁 전에 미국의 생산능력에 관해 미국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살펴보니, 일본의 공업은 미국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걸었으니 그야말로 ‘예정된 패배’라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예상이 미국에 뒤처졌기 때문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원자폭탄에 관해서도 일본의 그 방면 권위자가 히로시마에 투하되기 수개월 전 ‘이번 전쟁에선 실용화해서 써먹을 시간이 없다’고 단언한 판이다. 전체적인 수준에서 미국에 질 수밖에 없었다.”

망국과 국난(國難)으로 민들레 꽃씨처럼 대한해협 건너편에 피어난 손정의와 박무덕. 기구한 운명의 두 한국 핏줄을 통해 한국의 미래 비전과 현실 인식을 생각해 본다. 오늘, 20년 미래를 염두에 두고 2, 3년 앞을 헤아리며 정치하고 기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의 실력과 상대국의 경쟁력에 대한 과학적 평가는 되어 있을까? 정쟁과 내분으로 소일하며 또 한번의 국난을 예비하고 있지나 않은가?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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