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외교문서]한국, 美해공군기지 제주 유치 제의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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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공개된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부는 ‘브라운 각서’의 핵심인 한국군 현대화 계획이 지연되자 미국에 조속한 이행을 촉구했다. 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파병 장병들에게 김치 제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는 아울러 베트남전과는 상관없지만 제주도에 미 해·공군 기지를 건립하는 문제와 북한 지역에 북파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도 미 측과 협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브라운 각서의 이행 현황=1966년 3월 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각서를 보내 추가 파병의 대가로 군사원조 10개 항과 경제원조 6개 항을 제시했다. 외무부는 1966년 상반기부터 1969년 말까지 매달 국방부와 재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갖고 각서 이행 실적을 분기별로 꼼꼼히 점검했다.

각서 1항 ‘한국군 현대화 계획’이 지지부진하자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가 방미해 로버트 맥나라마 미 국방장관에게 조속한 이행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정 총리를 통해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한 친서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김치만이라도 한국군이 하루바삐 먹을 수 있게만 해도 사기는 훨씬 올라갈 것”이라고 밝혀 미국 측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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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미군기지 건립 추진=1968∼69년 한미 국방각료회담에서 정부는 제주도에 해·공군 기지를 만들어 주겠다고 미 측에 제의했다. 일본의 반환 요구가 거센 오키나와(沖繩) 미군 기지를 제주도에 유치하겠다는 것.

이는 미국 정치권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었다.

한편 1968년 미 워싱턴에서 열린 1차 각료회담에서 최영희 국방부 장관은 한국군의 취약한 정보수집력을 거론하며 북파 공작원을 언급하기도 했다. 최 장관은 “내가 헌병사령관 때 첩자를 보내 사진 찍은 일도 있다. 북한에 또 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해외 근무수당의 전용 의혹=공개 문서에 따르면 파병 장병의 해외 근무수당은 매달 중장은 300달러, 이등병은 37.5달러였다. 당시 국내 봉급은 중장은 월 175달러, 이등병은 월 1달러 수준. 정부는 이를 장병에게 전액 직접 지급하지 않고 80% 이상을 일괄 공제해 본국의 가족에게 송금했다.

그러나 공개문서에는 수당 누적 총액만 나와 있고 구체적인 지급 절차는 없어 수당 중 일부가 전용됐다는 해묵은 의혹을 풀기엔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한미 간 합의대로 수당은 파병 장병들에게 전액 지급됐다”며 “10월 중 구체적인 지급 실적 등 관련 문서 2200여 쪽을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1965년 10월 베트남으로 떠나는 장병들이 서울 시내에서 행진을 하고 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다’는 주장과 ‘젊은이들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었다’는 반론이 공존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이밍턴 청문회 대비=1969년 12월 미 의회가 두 달 뒤 베트남전 참가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및 수당 지급실태를 점검하는 ‘사이밍턴 청문회’를 열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정부는 다각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당시 외무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한국이 최대 수혜국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중국과 일본 등 비참전국의 전쟁 특수(特需) 공개를 미국 측에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주미대사에게는 한국이 ‘용병을 보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미국 측에 명백히 설명하라는 지침이 하달했다.

관련 문건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파월 한국장병의 근무수당이 타국 장병에 비해 너무 적다고 평가했다. 실제 미 정부는 청문회에서 1인당 파병 비용이 한국군은 5000달러인 반면 필리핀군은 7000달러, 미군은 1만3000달러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당시 국민소득 수준에 따라 수당지급률이 결정됐으며 미군은 전투수당과 가족수당 등을 추가로 받았다”고 설명했다.

▽기타=각서의 이행 여부를 놓고 한미 간 껄끄러운 마찰도 있었다. 1973년 미국이 파병 한국군을 대체하는 보충 병력의 유지비용 중 미지급액 690만 달러를 주 베트남 미군의 잉여 장비(약 484만 달러)로 대체하겠다고 요구했지만 한국은 줄기차게 현금 지급을 요구했다.

줄다리기 끝에 한국은 결국 미군의 장비와 전투식량, 미 8군 재고훈련탄을 받고 경비를 탕감했다.

베트남전 파병의 경제적 효과 (공개문서를 바탕으로 한 분석·당시 화폐가치)
항목금액
미국의 한국군 파병 경비약 10억 달러(한국군 현대화 6100만 달러, 파병장병 근무수당 2억 달러, 한국기업 베트남 진출 3억 달러 등)
미국의 군사원조 증가분약 10억 달러(1965∼1973년 연평균 1억 달러)
미국 군사원조 이관 중지에 따른 절감액약 1억 달러(미국이 1966년부터 군사 원조 일정 부분의 한국 부담을 추진하다 파병 대가로 1970년까지 중단)
베트남 특수로 인한 외화 획득약 10억 달러(건설용역 1억7000만 달러, 근로자 해외임금 1억3000만 달러 등)
기술이전 및 수출진흥을 위한 각종지원약 20억 달러(각종 차관 포함)
약 50억 달러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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