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보호법 ‘편법 감청’에 무방비…영장없이 ‘긴급감청’

  • 입력 2005년 8월 9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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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편법 감청을 계속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국정원은 최장 8개월 동안 개인의 통신 내용을 감청할 수 있다. 감청 사실을 당사자에게 통지해야 하는 규정이 있으나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게 전직 국정원 직원의 설명이다. 정보기관의 감청이 엄격한 기준 없이 남용되고 있는 셈이다.

▽사후 통지는 안 해도 된다?=통비법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불거진 ‘부산 초원복집 사건’을 계기로 1993년 12월에 제정된 이후 올해 5월까지 모두 11차례 개정됐다.

현행법은 정보·수사기관이 감청을 한 사건에 관하여 관련자를 기소하거나, 불기소 또는 불입건 처분을 한 날부터 30일 이내에 당사자에게 감청 사실을 통보하도록 정해 놓았다.

그러나 이 같은 사후 통지 규정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위태롭게 할 현저한 우려가 있을 때는 통지를 유예할 수 있다’는 조항 때문이다. 또 통지를 유예할 수 있는 기간이 별도로 명시돼 있지 않다.

실제로 정보기관이 감청 사실을 당사자에게 제대로 통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전직 국정원 직원의 증언이다.

검찰이나 경찰의 경우 통지 유예 사유를 검사장에게 제출해 승인을 얻어야 하지만 국정원 등 정보기관은 그럴 의무조차 없다.

▽전 국민이 잠재적 감청 대상=통비법에 정한 감청 대상 범죄는 내란과 외환죄는 물론이고 절도 폭력 약취·유인 등 형법상의 죄까지 합쳐 100가지가 넘는다.

한마디로 감청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다. 일본의 경우 감청 대상 범죄를 조직범죄와 총기관련 범죄 등 3, 4가지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한 차례 연장을 통해 최장 8개월간 할 수 있는 감청 기간도 너무 길다는 지적이 있다.

감청 관리 규정도 허술하다. ‘사건과 관련 없는 내용의 감청은 중단해야 한다’거나 ‘감청 현장에 통신회사 직원이 참여해야 한다’는 등의 제한 조항이 없어 실제 감청 과정에서 관리나 감독을 위한 별다른 방도가 없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李殷雨) 변호사는 “국가가 개인의 통신 내용을 8개월간 계속 감청할 수 있다는 것은 과도한 사생활 침해”라고 말했다.

▽긴급 감청 남용 우려=정보·수사기관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의 경우 일단 긴급 감청을 하고 36시간 내에 대통령의 승인을 얻도록 돼 있다.

그러나 사후 승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감청을 중지하면 그만이고 별다른 제재 조항이 없어 ‘우선 하고 보자’는 식의 무분별한 감청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

보안사범은 줄어드는데도 국정원의 감청이 최근 3년 사이에 4배 가까이 늘어난 이유는 이 같은 편법 감청이 갈수록 심해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감청 영장에 기재하는 혐의 내용이 포괄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성선제(成鮮濟) 영산대 법률학부 교수는 “한 번 긴급 감청을 했는데 사후에 허락을 못 받으면 동일 사유로 동일인을 다시 감청하지 못하도록 실질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준선(朴俊宣) 변호사는 “보유한 감청 장비의 운용에 관한 세밀한 규정이 필요하다”면서도 “감청 요건과 내부 감독 규정은 강화하되 원칙적으로 합법 감청의 취지를 훼손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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