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관치경제의 유혹

  • 입력 2005년 8월 3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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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가 코너에 몰렸다. 이른바 ‘X파일 사건’ 때문이다. 한쪽 주연(主演)인 삼성의 이미지는 말이 아니다. 다른 기업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경제5단체장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대(對)정부 건의안 발표 계획을 취소했다.

대기업에 마뜩찮은 시선을 보내던 일부 정치권과 정부당국, 사회단체는 힘을 얻었다. “그것 봐라. 한국의 간판기업이라던 삼성이 얼마나 부도덕하냐”는 주장이 잇따른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층 강력한 ‘재벌규제 법안’을 만들겠다며 벼른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권한을 더 강화해 기업을 옥죄려는 움직임도 있다.

X파일에서 드러난 삼성의 행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문제의 대화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런 정도까지였나’ 싶은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기업과 여야 정치권, 일부 언론사 사이의 음습한 유착도 도를 넘었다. 자본의 빛에 가려진 그늘을 새삼 느낀다.

불법도청과 정경(政經)유착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사법적 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삼성을 둘러싼 사회적 후폭풍(後暴風)이 쉽게 수그러들지는 미지수다.

시기도 좋지 않다. 가뜩이나 최근 우리 사회에는 삼성이 ‘돈의 힘’을 배경으로 오만해지면서 특별집단으로 군림하려 한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삼성이 위기를 직시하고 기업 본연의 위상(位相)을 재정립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 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빌미로 ‘관치(官治)경제 강화’의 논리가 득세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여론이 삼성 등 대기업에 부정적이라도 이런 때일수록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기업 때리기’가 우선은 후련할지 모른다. 하지만 젖소가 병이 났다고 아예 젖소를 죽여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부 권한을 확대해 기업을 더 규제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러면 기업과 정치권력, 행정권력을 둘러싼 관계가 더 투명해질까. 국가경쟁력이 높아지고 국부(國富)가 커질까. 보통사람들의 삶이 펴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줄어들까.

그 결과는 불행히 정반대로 나타날 것 같다. 정부와 정치권의 간섭이 커질수록 ‘어두운 뒷거래’의 빈도와 규모는 커지고 기업 활동은 위축된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규제는 ‘도움의 손’보다는 칼자루를 쥔 사람들의 발호(跋扈)와 부패를 조장하는 ‘착취의 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선(善)한 권력’이라는 개념만큼 착각은 없다.

국민경제적 비용도 감안해야 한다. 개인의 삶과 기업 활동에 정부가 간섭하는 풍조가 강할수록 국민은 힘들어지고 국력은 쇠퇴한다. 관치 평등에 집착한 현 정부의 낙제점 경제성적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반시장적 하향평준화와 포퓰리즘의 득세에 따른 경제의욕 쇠퇴는 올해까지 3년 연속 당초 전망을 밑도는 성장률로 이어지면서 수십조 원의 잠재적 국부를 허공으로 날렸다.

민간과 시장도 때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 확대가 불러오는 후유증과 사회적 낭비는 ‘시장 실패’를 훨씬 웃돈다. 규제문제 전문가인 최병선 서울대 교수는 “정부가 불타는 사명감으로 기업 규제에 나설수록 나라 경제를 더 망친다”며 과잉의욕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X파일의 충격이 아무리 씁쓸하더라도 관치경제의 유혹은 경계해야 한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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