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언론관 ‘세계’와 너무 달랐다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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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신문협회(WAN) 총회 개막식에서 나란히 앉은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개빈 오레일리 WAN 회장대행. 두 사람은 이날 축사를 통해 신문법과 한국의 언론환경에 대해 팽팽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연합
세계신문협회(WAN) 총회 개막식에서 나란히 앉은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개빈 오레일리 WAN 회장대행. 두 사람은 이날 축사를 통해 신문법과 한국의 언론환경에 대해 팽팽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연합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된 세계신문협회(WAN) 총회에서 한국의 언론 현실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드러났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한국 신문의 권한 남용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외국 언론인들은 한국의 신문법이 언론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세계 신문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가 한국의 언론자유 논쟁으로 번진 셈이다.》

▼盧대통령 언론에 공세▼

노무현 대통령의 WAN 총회 축사는 관례적인 축하 메시지와는 사뭇 달랐다.

노 대통령은 신문의 권력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세계 언론인에게 알리고 설득하려 했다. 노 대통령은 또 한국 언론 상황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보도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일제와 독재정권에 저항한 한국 언론 역사를 언급하며 “정의로운 펜을 꺾지 않은 신문과 언론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말로 축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논점은 이내 ‘언론 권력’으로 넘어갔다. 노 대통령은 “신문의 위기를 얘기하지만, 여전히 신문은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18세기 시민사회 이후 언론 자유에 대한 보호는 강조됐지만 언론 자체가 시장의 독점과 독점적 지배구조를 통해 권력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해 “정부가 언론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지만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지나칠 정도로 자유롭다”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신문사가) 의사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합리적인 내부구조를 갖추고 있을 때 우리 사회를 감시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또 “지금도 한편으로는 평화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살상무기와 같은 민감한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의혹을 부풀려 불신을 조장하고 그 결과로 국가간 대결을 부추기는 일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라며 이라크전 등에 관한 일부 세계 유력 언론의 보도 태도를 비판했다.

외국 언론인들은 노 대통령의 연설을 조용히 경청했으나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우세했다. 모로코의 나디아 사라하 레코노미스트 편집국장은 “언론이 권력화하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만든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NPA 브리튼즈내셔널 프레스 대표로 참석한 앤드루 모거 씨는 “노 대통령에 이어 연설한 개빈 오레일리 WAN 회장대행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해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오레일리 회장대행 반박▼

개빈 오레일리 WAN 회장대행이 30일 WAN 총회 개막식 연설에서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자 회의장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리를 뜬 상황이었지만 바로 전 노 대통령이 한 축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오레일리 회장대행은 우선 ‘한국에서 언론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되고 있다’는 노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한국은 언론의 자유를 얻기까지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으나 아직 완벽한 언론 자유를 획득하지는 못한 상태”라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주요 신문과 정부의 심각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요 신문의 자유를 제한해 그들의 힘을 줄이려는 (정부의) 계획이 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언론 분야에 대한 최근의 법적 움직임(신문법 제정)은 언론의 자유에 관한 국제적 기준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충격적”이라며 “법률로 신문사의 시장 점유율을 제한하는 것은 매체의 과도한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온당한 방법이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어 “WAN은 전 세계의 언론 자유를 증진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다”며 “한국의 이 같은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 대표들과 언제든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1980년대 변호사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음을 상기하면서 “언론 자유에 대한 노 대통령과 우리의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믿으며, 앞으로 노 대통령이 현명한 결정으로 우리의 그 같은 믿음을 확인시켜 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오레일리 회장대행은 영국 ‘인디펜던트’지의 사장으로 2003년 폐간 위기에 몰린 인디펜던트지의 판형을 타블로이드로 전환하고 기사를 혁신하는 개혁으로 1년 만에 판매부수를 35% 신장시켜 화제를 모았던 인물. 그는 WAN 부회장이었으나 WAN 회장이던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회장대행을 맡았고 이번 총회에서 회장으로 취임한다.

한편 WAN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의 신문법은 세계적 규범과 언론 자유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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